영화 [더 파더]를 중심으로
“여기에서 나가야 한다고요? 이 집이 제 삶이에요.”
노년의 부모님이나 친척과 대화를 하다 보면 이런 말을 듣게 된다. 낡은 집에서 혼자 사는 게 걱정되어 “좀 더 안전한 곳으로 옮기시죠”라고 제안하면, 오히려 단호하게 거절당하기 일쑤다. 어째서 많은 어른들은 그렇게도 오랜 세월 살아온 공간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는 걸까?
이 질문은 단지 심리학이나 가족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그 이면에는 ‘공간과 자아’, ‘기억과 존재’에 대한 철학적 질문이 숨어 있다.
우리는 흔히 공간을 배경으로만 생각한다. 마치 삶의 무대처럼, 인물이 등장하고 사라지는 그저 그런 곳.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공간은 더 이상 ‘배경’이 아니다. 공간은 곧 삶 자체이고, 기억의 보관소이며, 자아를 반사하는 거울이 된다.
노년의 어른들에게는 그 집 하나하나가 몸처럼 익숙한 감각의 확장이다.
창가에 앉아 차를 마시던 습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음악, 20년 넘게 붙어 있는 가족사진… 이런 모든 사소한 풍경들이 그 사람의 정체성을 구성하고 있다.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인간을 ‘세계-내-존재(Dasein)’라고 불렀다. 인간은 단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어떤 세계 속에, 어떤 공간 안에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가 말하는 이 ‘존재의 자리’는 단지 물리적 위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눈뜨는 장소,
나만의 방식으로 물건을 놓는 방식,
문 열고 나서 마주하는 익숙한 냄새와 소리 같은
삶의 감각적 뿌리와 닿아 있다.
그래서 공간을 떠난다는 건 단지 이사를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 끊임없이 확인해주던 모든 감각의 지층이 사라지는 일이다.
또 다른 철학자 미셸 푸코는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 즉 ‘이질공간’이라는 개념을 말했다. 그것은 현실 속이지만 내가 익숙하게 작동하던 리듬이나 규칙이 통하지 않는 공간을 말한다.
노년의 어른이 낯선 요양병원이나 병실로 옮겨졌을 때,
그곳은 아무리 좋은 시설이라도 ‘이질적인 공간’이다.
그곳에는 내가 자리를 잡을 수 있는 시간도 없고,
내 말투를 이해하는 사람도 없으며,
무엇보다 내 ‘리듬’이 허용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공간은 육체보다 먼저 영혼이 이방인이 되는 장소가 되어버린다.
이런 철학적 사유는 영화 《더 파더》(The Father, 2020)에서 탁월하게 표현된다. 주인공 앤서니는 치매를 앓으며 점점 현실과 기억의 경계가 무너진다. 그는 계속해서 같은 공간 안에 있다고 느끼지만, 공간은 점차 낯선 장소로 변해간다. 문이 바뀌고, 가구가 이동하며, 심지어 딸의 얼굴마저 바뀐다.
결국 그가 도착하는 장소는 런던의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에서 촬영된 안뜰로, 병원 정원처럼 묘사된다. 이곳엔 거대한 얼굴 조각상이 부서진 채 누워 있다. 이는 더 이상 자신을 인식할 수 없는 주인공의 자아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공간이 무너질 때, 자아도 해체된다는 사실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상징이다.
그러니 우리가 어르신에게 “여기를 떠나자”고 말할 때, 그 말은 단순히 “장소를 바꾸자”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의 시간을 버리라”는 말이고,
“당신의 감각을 리셋하라”는 말이며,
결국 “당신 자신을 다시 만들어보라”는 요구가 된다.
그들에게 그것은 ‘변화’가 아니라 자아의 일부를 잃는 일이다.
결국 공간은 우리 존재의 일부다.
특히 나이가 들수록 공간은 단지 삶의 무대가 아니라,
삶의 증거이고, 기억의 조각들이 서려 있는 영혼의 장소가 된다.
그리고 그 공간을 떠나는 것은
단지 발걸음을 옮기는 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놓아야 하는 일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