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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은 무슨 뜻일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by 하룻강아지

사람은 반드시 정체성 문제에 직면한다.

정체성 문제란 단어가 어려울 수 있는데, 아주 쉽다.

'나' 라는 옷걸이를 어떤 막대에 걸어놓고 있는가. 가 정체성 문제이다.



나는 훌륭한 사업가가 되어서 돈을 많이 벌고 싶었다.

그래서 실제로 광고 대행 사업을 했으며, 당시의 나는 스스로를 사업가라 생각했다.

그때 나는 나라는 옷걸이를 사업가란 막대에 걸어놓고 있었다.



나는 헤비메탈 레슨을 받으며, 노래를 부를 때 그 장르의 특징들을 배우려고 노력한다.

나는 스스로를 헤비메탈 보컬로 생각한다.

이때 나는 나라는 옷걸이를 헤비메탈 보컬이란 막대에 걸어놓고 있다.



또 나는 우리 아버지의 아들로 존재한다.

이때 나는 나라는 옷걸이를 아들이란 막대에 걸어놓고 있다.



명상에서 쓰는 질문인 '나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이 정체성이 '나' 가 아니라는 걸 알기 위한 강력한 도구다.

그렇다면 '나'를 왜 정체성으로부터 분리해야 하는가?

정체성이 사라질 때 고통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내 사업이 망해서 노가다를 나가게 된다면 난 더 이상 사업가가 아니다.

내가 성대결절에 걸려서 헤비메탈을 못 부르게 된다면 난 더 이상 헤비메탈 보컬이 아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다면 난 더 이상 우리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다.



정체성의 상실은 보통 인생의 고통스런 경험과 함께 오는데,

그 경험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더 이상 내가 그 정체성을 가질 수 없다는 상실감 때문이다.

내가 어떤 정체성에 몰입하면 몰입할수록, 이 데미지가 커진다.

정체성이 무너질 때 자아의 기반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불행의 메커니즘은 간단하다.

'나' 를 걸어놨던 정체성 막대기가 부러져서 -> 내(자아)가 땅바닥에 떨어져 받은 충격.

그게 불행이다.

이렇게 이해하면 명상의 해결책은 이론적으로 말이 된다.

어떤 정체성 막대기에도 나를 무겁게 걸지 않기.



그런데 이 지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서른이 넘으면, 한번쯤 죽음을 목격한다.

'죽음' 이란 건, 최종적인 정체성 파괴다. 더 이상 내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돈도 나를 걸어두기엔 부서지는 막대기란 걸 알게 되고,

여자도 나를 걸어두기엔 부서지는 막대기란 걸 알게 되고,

굉장한 프로젝트, 웅대한 꿈도 나를 걸어두기엔 부서지는 막대기란 걸 알게 된다.



'죽으면 끝인데' 를 넘어설 수 없는 것이다.

여태까지 대안이었던 모든 정체성 막대기가 사라지는데,

인간은 정체성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여기까지 알게 된 사람은 이제 '죽음 앞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정체성' 을 찾는다.

그것이 무엇인가? 영원이다.



사람은 영원한 정체성에 자신을 걸어두기를 갈망하게 된다.

이 지점을 전도서에선 이렇게 쓴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인간은 반드시 한번쯤 영원을 찾아헤메며

나름의 영원에 대한 답을 내린다.

그것이 있다, 없다, 모르겠다. 알 필요 없다 술이나 먹지,

영원은 신일 수도 있고, 해탈일 수도 있고 등등.



영원을 찾아헤메는 과정은 고통스럽고 손에 아무것도 쥔 게 없다.

정체성이 상실되어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영원을 찾아헤메는 그를 복되다고 얘기하신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를 부르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너를 어떤 정체성 막대에 걸어야될지 돌아다니면서,

부서지는 정체성들에 대해 실망하는 수고를 하지 말고,

내게 와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해주겠다.

너희는 내 이름으로 사랑이란 짐을 지게 되겠지만 너희 마음은 편안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만이 답이라는 걸 명확히 하신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건 '나만 답임' 이라는 배타적인 선언을 하는 게 아니다.

인간에게 부러지지 않는 정체성 막대기를 주기 위해서는,

죽음을 넘어서야 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반드시 고난당하고, 반드시 죽어야 했으며,

또한 반드시 부활해야 했다.



그때서야 인간은 죽음을 넘어선,

영원한 정체성 막대기를 받을 수 있고,

거기 자신을 걸고 편안히 쉴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분이 부활로 만들어내신 정체성 막대기를 받을 수 있다면,

그분은 나의 실존을 살려낸 존재이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그분을 내 주인, 나의 왕으로 여기며,

예수를 '주님' 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로마서 5장 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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