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지난 주에 잠언 한 구절을 읽었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이 문장은 모든 악에 대한 주권이 주님께 있음을 나타낸다.
그렇다면 문제가 생긴다.
예수님을 배신한 유다는, 자신의 자유의지가 아니라 주님을 배신하도록 설계된 존재였나?
이 문제에 대해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설명은 이렇게 얘기한다.
그렇지 않다. 유다에게는 회개할 기회가 많았지만 자신의 욕심에 넘어갔다...
아니, 그렇다고 보긴 어렵다.
왜냐면 유다가 바랐던 것과, 예수님이 하고자 했던 것이 달랐기 때문에 판 거지,
그의 욕심만으로 주님을 팔아넘겼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는 유대인이었고, 이방인의 압제에서 벗어나고 싶었으며,
(우리가 일제강점기 때 해방을 갈망했듯이)
인간 예수가 그걸 이룰 실력이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예수는 민족해방에 관심이 없는 듯했고, 그래서 유다는 예수를 팔았다.
범죄자는 타고나는 게 아니라 환경이 만든다고 한다.
유다의 성장환경을 조성하신 분은 주님이 아니신가?
그리고 그분이 전지하시다면, 유다가 특정 상황에서 배신할 확률이 더 높다는 걸 아시지 않았을까?
나는 유다의 배신이, '적당했다' 고 읽힌다.
그의 배신과, 잡힌 뒤 제자들의 도주가 있었기에
주님은 마지막 남은 한 조각의 존경마저도 빼앗기시고 십자가에 달리실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게 그분의 뜻이었고.
주님의 구원 사역은 유다의 배신으로 완성되었다.
그래서 그의 악행은 적당했으며, 그의 마지막은 비참했지만 나는 왠지 유다가 지옥에 갔을 것 같지 않다.
죽은 다음에 아들아 그건 틀렸다. 떽. 이라고 주님이 내게 말씀하실수도 있지만...
그래서 신자에게 허락된 고난은 참으로, 주님이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미운 사람도, 힘겨운 사건도, 그분의 주권 아래 있다.
시편에는 눈물로 주님께 기도를 올리는 장면이 많이 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주님이 존재하지 않으셔서 숨으셨겠나, 그게 아니라, 그 스테이지는 그렇게 깨야 하기 때문인거다.
신자의 입장에서 가해지는 세상의 악의를, 보통은 마귀라고 해석하는데,
아니, 나는 마귀조차 주님이 부리시는 종이라고 생각한다. 선과 악은 대립되지 않는다.
선이 악을 봐주고 있는 것이다.
욥기를 읽어보면 마귀의 원형이 되는 사탄은,
인간을 참소하는 참소자의 위치에서 주님의 어전회의에 참여한다.
주님의 관할 아래 있다.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주님 앞에 섰는데, 사탄도 그들과 함께 서 있었다.
주님께서 사탄에게 "어디를 갔다가 오는 길이냐?" 하고 물으셨다.
또, 복음서에서 주님은 사탄이 제자들을 요구했으나 넘겨주지 않으셨다고 한다.
주님께는 신자를 사탄에게 넘겨주실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욥기의 연장선상인거지.
시몬아, 시몬아, 보아라.
사탄이 밀처럼 너희를 체질하려고 너희를 손아귀에 넣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나는 네 믿음이 꺾이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네가 다시 돌아올 때에는, 네 형제를 굳세게 하여라.
그럼 신자가 겪는 악이나 어려움이란 건 뭔가. 하나님이 일부러 어렵게 하셨다는 건가?
그럼 고난을 겪고 주님을 떠난 사람들은 불지옥에 한번 빠져보라는 건가?
악인은 어찌되는 건가, 유다는?
솔직히 거기까진 잘 모르겠다.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주님을 떠난 그 순간만 기억한다.
하지만 삶은 이어지고, 그가 뭘 배울지는 아무도 모른다.
또 그가 그렇게 삶을 마쳤다고 하더라도...삶을 마칠 때 주님을 믿지 않았어도,
기회가 한번 더 주어졌으면 좋겠다. 어쩌면 더 좋은 기회일 수도 있고,
지옥은 한쪽의 극단이니까, 다른 쪽과 통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는 결국 이 글의 결말처럼, 신이 될 것이다.
다 뇌피셜이지만 내가 믿는 건 이거다.
내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면, 주님은 이보다 더 큰 생각을 하시겠지.
어쨌든, 주님이 악을 다스리신다를 갖고 여기까지 오면,
내 눈 앞의 적으로 여겨지는 사람도, 적이 아니라 주님이 보내신 사람으로 읽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다윗은 그렇게 했다. 아들의 반란 때문에 수도를 떠나 도망갈 때,
시므이란 사람이 다윗에게 욕을 하며 돌을 던진다. 좌우의 장군들은 죽여버리겠다고 칼을 뽑는데
다윗은 이렇게 얘기한다.
왕이 가로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가(시므이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대체 왜 주님은 악과 고난을 가지고 우리를 다스리실까.
왜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치실까.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그는 우리가 신이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말씀처럼,
다른 어떤 신, 자아로 꽉 찬 신이 아니라
자신과 같은 신이 되길 바라시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그래서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최종점은 주님이시고,
그분은 본인...아니 본 신을 뛰어넘길 원하신다.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그렇게 신이 된 인간은, 적도, 불리한 상황도 모두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모든 것이 주님의 다스리심 아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인생의 모든 과정이, '합력해서 선을 이뤄서'
드디어 이 말씀에 도달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부디 내가 끝까지 가기를.
주님의 자식임에 부끄럽지 않은 남자가 되기를.
그래서 신으로 죽기를 바란다.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3: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