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살검(龍殺劍)

게임과 현실은 같다

by 하룻강아지

어떤 온라인 게임을 시작했다고 생각해보자.

당연히 시작할 때의 레벨은 1이다. 모든 사람이 그렇듯이, 초심자는 레벨 100에 도달해서, 세상을 어지럽히는 용을 죽이고 모든 사람의 선망을 한몸에 받고자 한다.

그럼 이제 시작한 레벨 1인 초심자가, 세상에서 날뛰고 있는 흑염룡을 처치할 수 있을까?

없다.

결단코 없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없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이 게임을 시작하는 사람은 레벨 1이 흑염룡을 잡을 수 없다는 걸 누구나 알고 있다. 그건 상식이다.



레벨 1의 아무 특징도 없는 평범한 인간 캐릭터인 초심자는,

처음에는 반드시 길에 떨어져 있는 나뭇가지를 무기로 삼을 수밖에 없다.

당연히 게임을 시작하는 누구나 알고 있다. 레벨 1이 용을 때려잡는 전설의 무기인 용살검(드래곤 슬레이어)를 장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다.

용살검은커녕, 초심자는 떨어진 나뭇가지를 줏어다가 풀숲에서 나오는 토끼나 잡으며 레벨을 올려야 한다.

세상에 평안을 가져다주는 위대한 용사가 그 스스로가 생각하는 자화상일지언정,

게임을 시작하는 사람은 그가 선망하는 용사가 아니다. 초심자의 현실은 토끼의 뜀박질조차 쫓아가지 못하는 그냥 마을 사람 1일 뿐이다.



이건 인정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냥 현실일 뿐이다.

빠른 성장이라는 것은 만국 공통의 욕망이기 때문에, 어떤 초심자들은 게임에 실제 돈을 투자해서 성장 패키지를 산다.

과연 성장 패키지는 효과가 있어서, 레벨이 빨리빨리 오르고, 목표하는 바에 좀 더 빨리 가까워지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레벨을 점점 올릴수록 게임에서 다른 사람들을 만나 이런저런 도움을 받고, 때로는 성장에 정체기도 오고, 예측할 수 없는 과정을 거쳐서 개중에 특별한 초심자는 결국 용살검을 얻고, 세상에 혼란을 일으키는 흑염룡을 잡는다.



그래. 게임에선 이럴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게임에선 이런 경험을 곧잘 한다.

이뤄놓은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게임상에서는 아주 레벨이 높거나 대단한 유저인 것을 가끔 볼 수가 있다.

그럼 대체 그 사람들이 현실에선 왜 힘을 못 쓸까?

원리는 게임과 완전히 같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계속 나아가거나, 아니면 성장 패키지를 구매해서 레벨을 빨리 올리려는 시도를 할 수 있다.



문제는 여기서 나타난다.

게임에서는 그렇게 효과가 있는 성장 패키지가 현실에서는 왜 효과가 없는가?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첫번째는, 그 성장 패키지가 사기일 경우다. 실제로 세상에는 아주 나쁜 패키지들이 존재한다. 이 경우는 논외다. 일단 넘어가보자.

둘째는, 그 성장 패키지가 남들에게는 효과가 있는데 나에게는 효과가 없을 경우다.

이건 왜 그럴까? 게임에서는 분명 먹혔는데, 그리고 다른 사람에겐 먹히는데 왜 내 현실에서는 안 되는 걸까?

그건 패키지를 구매한 사람이, 현실에서는 행동을 안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게임에선 레벨 1임을 인정하고, 눈앞의 토끼부터 잡는다.

그러나 현실에서 제법 많은 사람들은 입으로는 레벨 1임을 인정할지언정 속마음은 그렇지 않다.

이런 것을 해보라, 저런 것을 해보라고 앞선 레벨30, 레벨 50의 유저들로부터 조언을 받는다.

그런 조언들은 초심자의 수준에 맞춰 대개 아주 기초적인 것들이다.

심지어는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다. "음...현재 상황에서는 토끼를 잡으세요."

조언을 주는 사람이 레벨이 20이건, 50이건, 100이건 레벨 1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조언은 토끼를 잡으라는 것 뿐이다.

게임에서는 이것을 아주 뼛속 깊이 인정한다. 한 치의 의심이 없다. 레벨 1인데 토끼를 잡지 않고 뭘 하겠는가?

그러나 현실에서, 사람들은 이것을 부정한다. 나도 그랬다. 지금도 가끔 그러는 것 같다.

남들 다 잡는 그냥 토끼가 아니라, 경험치를 2만씩 주는 특별한, '나만이' 잡을 수 있는 다이아몬드 토끼가 있을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과거의 나를 포함한 어떤 초심자들은, 토끼를 잡지 않는다. 그러면서 다이아몬드 토끼를 찾아 이 사냥터 저 사냥터를 기웃거린다.

그러나 그런 토끼는 없다. 알면서도 찾아 헤멘다.

뭔가 하나를 떠올렸으면, 그게 당신의 토끼다.

화가가 되고 싶은가? 한 장이라도 그림을 그려본 적은 있나?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려봤으면 붓으로 그림을 그려본 적은 있나? 그린 작품을 남에게 보여준 적은 있나?

여행사를 차리고 싶은가? 한번이라도 여행을 다녀온적 있나? 그 과정을 기록으로 남긴 적 있나? 당신의 여행에 다른 사람을 동행시켜 다녀온 적이 있나?

무슨무슨 앱을 만들고 싶은가? 앱으로 구현하고자 하는 그 서비스를 오프라인에서 실행해서 수익을 내본 적이 있나? 최소한 앱으로 구현할 서비스를 스스로 겪어본 적은 있나?

생각나는대로 써봤는데, 보통 대답은 아마도 '아니, 해본 적 없다' 일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지금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일부터 해야 한다.



게임에선 토끼를 잡는데 한 점 의심이 없는 사람들이, 현실에선 이렇게 하지 않는다.

앞으로 어떻게 될 지 모르겠기 때문이다. 온라인게임에 접속해 Z키를 눌러서 가상의 토끼를 잡는 행위와, 현실에서 떠올린 그 행동을 하는 데 드는 시간과 돈, 그리고 에너지, 어쩌면 생길지도 모르는 문제와 받게 될지도 모르는 굴욕은 그 리스크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을 하지 않는다.



나는 그림을 못 그린다며 그리지 않는다. 붓은 써본 적 없으니 쓰지 않는다. 졸작이 나온 것 같고 남이 욕할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해 남들에게 그림을 보여주지 않는다.

귀찮으니 여행을 가지 않는다. 남이 보고 비웃을까봐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는다. 누가 나랑 같이 여행을 가겠냐며 다른 사람과 여행을 가려는 시도 자체를 않는다.

이핑계 저핑계를 대며 서비스를 만들려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네이버 검색 세 번 해보고 그런 서비스가 없다고 결론내린다. 컴퓨터 언어 책을 빌려왔지만 30페이지 보고 어려워서 덮는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도 다 아는 이 방법 말고, 다른 방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성장의 모든 과정을 알량한 지식과 망상에 불과한 계획을 가지고 예측하려 든다.

지금 장비할수밖에 없는 나뭇가지를 두고, 발견하지도 못할 용살검을 찾아 헤멘다.

그건 레벨 80이나 되어야 구할까 말까 한 무기다.

레벨 1인 마을 사람이 초보자 사냥터를 헤메면서 운좋게 먹을 수 있는 무기가 아니란 말이다.

그렇지만 과거의 나를 포함해 이런 사람들은 초보자 사냥터를 기웃거리며 용살검을 찾아 헤멘다.

웃기지 않는가? 나도 운만 좋으면, 돈만 많으면, "기회만 한 번 오면!"



레벨 1인 사람이 초보자사냥터에서 토끼를 상대로 용살검을 먹을 확률은 없다.

오백만 보 양보해서 먹었다고 해도 장비할 수 없다. 레벨이 안 되기 때문이다.

실제 세계에서 이제 시작하는 사람이 스티브잡스의 아이폰같은 아이템을 생각해낼 확률은 없다.

오천만 보 양보해서 찾았다고 해도 실행할 수 없다. 레벨이 안 되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을 하면 된다.

못하겠는가? 그럼 그것보다 쉬운 일을 하면 된다.

예를 들어서 이 카페에 글을 쓰는 일이 떠올랐다면, 그것을 하면 된다.

이 카페에조차 글을 못 쓰겠다고 생각한다면, 댓글을 단다.

댓글은 매일 다는데 카페에 글을 쓸 용기가 안 생긴다면, 매일같이 댓글을 달면 된다.

그러면 어느 날 정말 어쩌다 글을 쓴다거나, 오프라인에 한번 가볼 용기가 생길 것이다.

댓글을 열심히 달았다면, 사람들은 알아봐줄 것이다. 운이 좋다면 마침 필요한 조언이 주어지거나 사람이 붙을 수도 있다.

매일 댓글을 다는 게, 하면서도 정말 쓸모없는 짓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절대적인 레벨은 올라 있다.

댓글을 열심히 단 이 사람은, 입을 다물고 스스로의 토끼를 잡았기 때문이다.



물론 게임과 현실은 다르다.

현실에선 열심히 노력했는데 아무 성과가 없어 포기할 수도 있다.

사람의 일은 아무도 모른다.

그렇지만 다른 선택이 없다는 것을 게임에선 인정하면서, 왜 현실에선 인정하지 않는가?

레벨 1이면 게임이나 현실이나 토끼를 잡아야지, 게임에도 없는 특별한 다이아몬드 토끼가 현실에선 출현할 줄 알았는가?



꿈은 깨는 것이 좋다.



지금 당장 나뭇가지를 들수조차 없으면서 용살검을 찾아 헤메는 사람은,

그 최소한의 실행조차 두려워하는 겁쟁이일 뿐이다.

만약 스스로를 초심자라고 생각한다면, 자신의 분수를 인정하고 나뭇가지를 들어라.

제일 빠른 길은 나뭇가지를 들고 지금부터라도 토끼를 뒤쫓는 길이다.

그러면 '발전하는' 시간이 흐르기 시작할 것이고, 절대적인 레벨은 오를 것이며,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선천적인 재능과 후천적인 노력, 그리고 행운의 손과 여신의 사랑이 당신에게 주어진다면, 언젠가 당신은 용살검을 들고 당신이 바라마지않던 바로 그 용사가 될지도 모른다.

설령 그 용사가 이번 생에서 당신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당신의 결말이어도 당신은 웃을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스스로를 인정하고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인 아주 멋진 사람이니까.



용살검을 들고 싶다면 꿈을 깨고 나뭇가지를 들어라.

선택지는 하나뿐이고, 다른 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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