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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룻강아지 Aug 27. 2024

행복을 찾아서 3

당신은 죽지 않는다

*삶이 극도로 허무한 사람을 위한 글이다.

*당신에게는 희망이 있다.

*당신은 신이 기다리는 존재다.



1편 - 현대철학사조 및 뉴에이지적 참나영성이 행복을 가져다줄 수 없는 이유

https://brunch.co.kr/@metalcsh/83


2편 - 시공간을 초월한 영원성에 대한 갈망이 충족될 수 있는 이유

https://brunch.co.kr/@metalcsh/84



*1,2편에서 한 얘기들을 반복하는 걸 최대한 피하고 있다.

따라서, 1,2편을 꼭 읽어주시길 부탁드린다.

이런 주제에 관심을 가진 분의 깊이라면 충분히 읽고 이해하시고도 남는다.

-




1,2편의 논의를 바탕으로,

사람이 행복하기 위한 조건은 세 가지 있다는 걸 알았다.

우리는 그중 첫번째를 살펴보고 있다.



<사람이 행복하기 위한 조건>

1. 시공간을 초월한 영원성에 대한 갈증 해소

2. 영원함으로부터 느끼는, 삶의 어떤 조건에 서 있더라도 느끼는 괜찮음(=평안함)

3. 평안함에서 나오는, 나를 사랑할 수 있고 남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



영원성에 대한 갈증은 신으로만 해소할 수 있다.

왜냐면 세상의 그 무엇도 영원함이라는 가치를 줄 수 없으니까.



그 신은 예수인데, 그가 부활한 게 역사적인 사실이기 때문이다.

부활이 역사적인 사실인지 따져보기 전에 짚어야 할 게 있다.

왜 꼭 역사적인 증거로 예수가 신이라는 게 뒷받침되어야 할까?



신앙은 바깥의 증거와 상관없이 내 안의 깊은 확신을 바탕으로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런 개인적 믿음은 때로는, 많은 심리적인 간섭으로 인해 왜곡되어 이상한 걸 믿게 된다.

'왜곡된다' 는 건, 개인적 믿음이 세계의 작동방식과 들어맞지 않는다는 거다.

내가 어떤 것을 세계의 법칙이라고 믿기로 했는데, 세계가 그것을 증명해주지 않으면,

그 내면세계적 믿음은 피카츄가 현실에 동물로 존재한다고 믿는 것만큼 터무니없다.



신에 대한 믿음도 마찬가지다. 내가 신이 있다고 믿는데,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없다면,

아기들이 헬로키티 인형이 나를 지켜줄거라고 믿는 것과 대체 어떤 차이가 있는가?



오늘날 종교가 다 똑같다고 대중들이 몰아가는 게 바로 이 지점이다.

'어차피 종교는 다 내면수행 아니냐?'

'그중에 편한거 골라 믿으면 되는 거 아니냐?'



그러나 신앙이 단순한 내면 수행을 넘어, 객관적인 증거와 교차검증된다면?

그 신앙은 주관적 확신을 넘어서는 진리가 된다.

따라서 뭘 믿기 전에, 그 종교가 내면세계에서의 사실일 뿐만 아니라,

세계와 교차검증되는지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신이 존재하는지를 실제로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게다가 신이 인간으로서 직접 내려온다고 해도, 사람들을 믿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기적은 안된다고 2편에서 논의했다.

예수는 바로 이 문제의 당사자였으며,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너희는 진정한 신을 알 수도 믿을 수도 없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를 못 믿을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내가)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여기서의 '그 일'이란 예수가 행한 기적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이다.

예수는 부활을 보고 나를 믿으라고 했다.

왜냐면 그 누구도 죽음으로부터 돌아온 존재는 없기 때문이다.

부활이야말로 그가 누구인지를 증명하는 결정적인 사건이다.



그래서 예수가 부활했다는 역사성을 따져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건 신이 정말로 존재하는가? 를 따져보는 것이고,

우리의 행복의 조건 첫번째, 

영원성에 대한 갈증이 풀릴 수 있는 것인가? 를 따져보는 일이다.



부활의 역사성과 함께 넘어야할 산이 있다. 예수의 부활이 참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곧바로 다른 임사체험이나 환생과 비교하게 된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은 다른 임사체험이나 환생과 세 가지가 질적으로 다르다.



1. 중대한 육체적 손상으로 인한 사망.

2. 죽기 한참 전부터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함.

3. 죽음 이후에도 사람들이 그가 같은 사람임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비슷한 모습으로,

그리고 분명한 자아를 가진 채로 부활함.



내가 알기로 이 세가지를 만족시키는 임사체험이나 환생은 없다.

하나씩 뜯어보자.






1. 중대한 육체적 손상으로 인한 사망.



십자가 처형은 전쟁기계였던 로마군이 가장 사람을 고통스럽게 죽이기 위해 만든 형벌이다.

1986년에 미국의학협회지에 실린 글에서, 한 의사는 십자가형을 이렇게 묘사한다.



//

땅에서 떨어져 십자가에 달린 채로

질식하지 않고 숨을 쉬려면, 발로 몸을 밀어 올려야 했다.


하지만 그러면 몸무게 전체가 발목에 쏠리고,

그 결과 못에 박힌 발목엔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가해진다.


몸을 들어올리는 동작을 하면서 팔꿈치를 구부리면

못에 박힌 손목이 못 주위로 회전하며,

손상된 신경을 따라 불타는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


또 밖으로 뻗어 들어 올린 팔의 근육 경련과 감각 이상이 불쾌함을 더하고,

그 결과 호흡하려고 할 때마다 고통스럽고 기진맥진하여

더 이상 몸을 들어올리지 못해 결국 질식에 이르고 말 것이다.

//



십자가 처형이 너무 고통스러우므로,

죽어가는 십자가 사형수에게는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일종의 안락사를 했다.

활로 쏘거나 발목을 꺾어서 발을 밀어올리지 못하게 해서 빨리 질식하게 해주거나,

예수처럼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서 빨리 죽게 만들어줬다.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이때 예수가 찔린 옆구리라는 것은 의학계의 지배적인 견해에 따르면 심장이다.

심장 주변에는 심낭이라고 하는 일종의 주머니가 있고, 액체를 저장한다.

예수가 찔렸을 때 물과 피가 쏟아져나왔다고 하는데, 심장을 찔러서 피와 심낭의 액체가 쏟아진 것이다.



이렇게 십자가 처형에서 받는 신체적 손상은 현대의학으로도 복구 불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는 부활해 나타났다.

그러려면 단순한 임사체험이나 환생과는 차원이 다른 신의 개입이 있어야 한다.



임사체험의 대부분은 몸과 뇌가 완전히 죽기 전에 일어난다.

환생은 동일한 신체로 부활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는 완전히 죽은 상태에서 똑같은 몸으로 부활했다.



일반적인 임사체험이나 환생이 예수의 부활과 맞먹으려면,

- 십자가 처형과 맞먹는 심각한 팔다리의 손상

- 십자가에 달림으로 인한 질식사

- 창에 심장을 찔림

이라는 신체손상의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거의 모든 환생이나 임사체험이 이 첫번째 기준에서 탈락한다.






2. 죽기 한참 전부터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함.



예수가 자기가 죽을 것이라고 예고한 것은 4복음서 전체에서 10번 이상 나온다.

각 복음서별로 하나씩 가져와보면 이렇다.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

마태복음 17:22-23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리니 그들은 그를 조롱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며 죽일 것이니

그는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

마가복음 10:33-34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조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8:31-3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한복음 12:23-24



이처럼, 예수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명확하게 예고했다.

반면, 임사체험이나 환생에선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고,

그 후에 특정한 시점에 부활할 것을 명확히 예언한 사례가 없다.

이는 예수의 부활이 단순한 임사체험이나 환생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건임을 보여준다.






3. 죽음 이후에도 사람들이 그가 같은 사람임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똑같은 몸으로, 

그리고 분명한 자아를 가진 채로 부활.



예수는 죽기 전과 똑같은 몸과 자아를 가지고 부활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가고 죽이다

나중에 부활한 예수를 보고 회심한 바울에 따르면,

살아난 예수를 봤다는 사람의 숫자는 약 500명이다.

500명이라는 다수의 목격자 증언은 예수의 부활이

단순한 전설이나 신화로 설명될 수 없음을 강력하게 뒷받침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베드로)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바울) 보이셨느니라

고린도전서 15장



근데 여기서의 500명은, 대충 많아 보이려고 지어낸 숫자가 아닐까?

그럴 수 없다.



가장 비판적인 학자들조차 바울이 부활한 예수님을 봤다는 증언을

사도들에게 받은 시점을 A.D 35년이라고 추정하는데,

그 시점은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받은지 겨우 5년 뒤다.

2편에서 얘기했지만 고대 기록은 실제 사건과 기록 사이에 1세기가 차이나도

신빙성 높은 자료로 여겨진다.



5년은 어떻게 나오는거냐면,

일반적으로 바울의 회심 시기를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받고 2년 후라고 추정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에서 회심한 지 3년 뒤에 다른 사도들을 만나러 예루살렘에 갔다고 썼다.



그 후 삼년만에 내가 게바(베드로)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 오일을 유할쌔



그래서 독일 역사학자 한스 폰 캄펜하우젠의 추정대로,

바울이 베드로를 만난 시점은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받은 지 5년 후이고,

그 때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의 명단을 베드로에게 넘겨받았다.



그래서 부활과, 부활 목격을 주장한 초기 증언 사이에는 시간차가 거의 없다.

만약 사도들이나 바울이 거짓으로 부활을 주장했다면,

당시에 예수님의 죽음을 목격한 사람이 많았으므로

얼마든지 반박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오는 예수의 동생 야고보가 그렇게 반박할 수 있었던 사람 중 하나다.

야고보는 예수의 동생으로, 예수와 한 가정에서 자랐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야고보는 예수가 신인 걸 믿지 않았다. 솔직히 나라도 믿겠다.

우리 형이 '내가 신이야' 라고 하면 나는 '지랄하지 마' 라고 대답할 것이다.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야고보는 예수가 십자가에 달릴 때까지도 예수를 신이라고 믿지 않았다.

예수가 죽는 자리에도 찾아와보지 않았다.

아마 '미친 형'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고린도전서에 따르면 야고보는 부활한 예수를 보고 회심했으며,

후에 신약성경의 '야고보서' 를 쓰고, 전승에 따르면 돌에 맞아 순교했다.

대체 야고보는 뭘 보고 그의 형이 신이 맞다고 죽음 앞에서까지 믿게 된 것일까?



예수는 자신의 몸과 분명한 자아를 갖고 부활했고,

예수의 부활은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일어날 일의 예고편이기 때문에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예수의 첫 부활로 봤을 때, 부활은 참나영성 따위에서 말하듯

추상적인 사후세계, 혹은 물방울이 자신을 모두 잊고 바다로 돌아감. 같은 게 아니다.

부활은 지금의 내 몸과 내 자아를 가지고 일어나는 일이다.






그래서 부활이 나한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 외에도 지면상 쓰지 못한 예수의 부활에 대한 역사적 증거가 많다.

예수는 정말 부활했다.



예수의 부활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예수의 부활은, 이 세상에 대한 신의 유일한 초월적 개입이었으므로, '신이 있다' 는 걸 증명한다.

그렇다면 신이 있다는 것,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은 인생의 허무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



허무는 죽음에서 나온다. 죽음은 모든 것을 끝내며, 모든 것을 사라지게 한다.

1편에서 살펴봤듯 현대철학이 무슨 짓을 해도 돌파할 수 없었던 지점이 바로 여기, 죽음이다.

죽음을 돌파할 수 없으므로 '어차피 죽을거 한 세상 잘 살다 가자' 라는 구호가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부활함으로써 허무의 궁극적 원인, 죽음을 파괴했으며,

바울은 로마서에서 죽음 그 자체를 조롱한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여기서의 '이김' 은 죽음에 대한 이김이다.

바울이 죽음을 조롱했던 것처럼, 이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된다.



사람은 죽지 않으며, 자아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것이 예수의 부활이 주는 희망이며,

그 어떤 철학도 줄 수 없는, 인생의 허무를 이겨내는 유일한 답이다.



그래서 부활한 예수를 직접 본 바울은,

부활이 없다는 주장을 하는 고린도인들을 향해 이렇게 외친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삶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제일) 불쌍한 자리라.



우리가 한 모든 일들은 결코 중단되지 않으며, 헛된 일이 아니다.

사업가가 고객의 만족과 이윤극대화를 위해 노력하는 일은 헛된 일이 아니다.

과학자가 우주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려고 망원경을 쏘아올리는 것은 헛된 일이 아니다.

피아니스트가 협주곡의 어려운 부분을 연습하느라 손이 꼬이기를 반복하는 건, 헛된 일이 아니다.

우리는 영원히 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라.



우리가 했던 모든 실패도 헛짓거리가 아니다.

공부를 열심히 했으나 수능을 망한 것도 헛짓거리가 아니며,

사업을 위해 노력했으나 역량부족으로 실패한 일도 헛짓거리가 아니고,

열렬히 사랑했으나 결국 이별한 일도 헛짓거리가 아니다.


우주를 미세조정한 바로 그 신이 우리의 모든 실패를,

사람들에게 유익한 것으로 바꿀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가 한 모든 선행 또한 아무 의미 없지 않다.

대형 기부단체의 광고를 보고 어떤 사람에게 쓰이는지 모르겠지만 기부한 돈도,

힘들어보이는 사람에게 작은 격려를 해준 일도,

거리에서 구걸하는 사람에게 온정을 베풀어준 일도 어느 하나 의미없지 않다.


단지 '착한 일은 의미 있어.' 라는 죽으면 사라질 허무한 구호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한 일이 영원한 존재 앞에 기억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우리는 영원하다.



죽은 철학자들이 뭐라고 하건, 당신은 세상에 던져진 존재 같은 게 아니다.

당신은 본질 없이 실존만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가 아니며,

당신이 어떤 상황에 있건, 당신은 신이 지키는 존재다.



십자가에 달리기 전 예수의 마지막 기도에서,

예수는 이 글을 읽는 당신을 가리켜 콕 찝어 기도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그리고 예수는 당신의 모든 허무와 공허를 치료할 수 있는,

그의 신적인 사랑을 당신에게 나눈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줄 알았삽나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당신은 나는 예수를 믿지 않아. 우리는 죽을 뿐인 존재야. 라고 얘기할 수 있다.

맞다. 당신은 놀랍게도 신의 사랑을 거절할 수 있는 존재다.

그렇지만 예수는 당신의 옆에 서서 당신이 허무로부터 등을 돌리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예수가 승천하기 전 한 이 마지막 말은,

그저 오래된 문서인 복음서에 써있는 문장이 아니라,

신이 당신에게 직접 하는 말이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태복음 2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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