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lovedreamer
Sep 07. 2020
말도 통하지 않는 베트남 임신부이다.
한눈에 봐도 부른 배가 바로 명치까지 터질 듯이 채우고 있다. 고작 스물아홉. 예 , 아니오, 아파, 괜찮아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 네 마디. 같이 온 남편은 오십 줄은 되어 보인다. 이십 대 아니 삼십 대의 남편이라면 말이 잘 안 통하는 외국인 아내에게 뭐라도 살갑게 할 눈치가 있으련만 산통으로 말없이 힘들어해도 조용히 옆을 지키고만 있다.
상황이 이렇다 저렇다 설명하여도 제대로 이해를 하는 것인지 아리송하다.
의사소통이 어려운 환자이면서 예상되는 아기의 몸무게가 3.8킬로라 한다. 4킬로 이상 몸무게의 아기를 거대아라 하니 거의 근접하는 수준이라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다. 다행히 임신부의 골반이 큰 편이라 분만은 순조로웠다. 무통 시술을 한 탓으로 통증이 와도 임신부는 제때 맞춰 힘을 주지 못하여 한참 애쓴 다음 나온 애기는 3.7킬로 나가는 사내아이였다. 그 사이 얼어있던 남편은 고생했어 대신 '고추다' 이렇게 한 마디하였다. 그 모습을 본 간호사는 그만 픽 하고 웃어버렸다. 하지만 출산하자마자 쭉쭉 수도꼭지를 최대한 튼 것처럼 흐르는 피로 같이 웃을 새가 없었다. 순식간에 일 리터가 넘는 피가 흘러내렸다.
순식간에 자궁으로부터 따뜻한 양수와 피를 쏟아낸 환자의 몸은 추위와 두려움으로 떨리기 시작한다. 어차피 해도 통하지 않을 말이겠지만 의식을 잃지 않도록 어떤 말이라도 지껄여줬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든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남편에게 짧은 설명을 하고 코로나와 전공의 전면 파업이라는 상황으로 폭탄을 맞은 상황일 대학병 원의 교수님과 통화를 시도한다. 늘 씩씩하던 분의 목소리 대신 체념이 섞인 느린 톤이 없는 무채색의 대답을 듣고 죄송한 맘이 앞선다.
급박한 상황을 설명하고 앰뷸런스에 환자를 싣고 마구 흔들리는 중 상태를 점검한다. 출발 시 안정적이었던 활력징후가 나빠지기 시작하면서 저혈압으로 어지러운지 토하기 시작한다. 차 안이 신선한 피 냄새, 연신 흘리고 있는 간호사의 땀냄새, 먹은 것 도 없는 것을 게워낸 시큼한 위액 냄새로 채워졌다. 속이 메슥거리는 것도 잠시, 출혈과 수액 투여, 혈압, 맥박을 재며 지혈을 위해 자궁 마사지를 돌아가며 한다. 이따금 말이 통하지 않는 환자에게 눈 떠요, 정신 차리세요 라고 소리치며 희미해지려는 의식을 돌리려 애를 쓴다.
신호를 무시하며 달린 앰뷸런스는 드디어 응급실로 순조롭게 도착했다.
응급실은 코로나로 통제되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이미 연락이 된 상태라 쉽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한동안 뵙지 못한 교수님의 머리칼은 더욱 희게 물들어 있었고 자조적인 미소만 반길 뿐 웃음기가 사라졌다. '이제 저희가 맡을 테니 가셔도 됩니다.' 답하신다.
반쯤 넋이 나간 남편에게 이제 여기서 치료받고 좋아지면 오시라 하니 그제야 '수술받으면 좋아지죠?'라고 한다. 간단한 설명을 하고 안심이 될지 모를 '치료받으면 좋아지실 겁니다.'라고 덧붙였다.
가는 동안 처치한 탓인지 다행히 도착 시 환자의 혈압이 다시 안정적으로 회복하여 아마 경과가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리라 믿는다.
진료실로 돌아와 잠깐 한숨을 돌리고 있자니 바짓가랑이에 검은색으로 눌어붙은 핏덩이가 보인다. 영매가 물건을 매개로 물건의 주인의 영혼과 소통을 시도하듯 한동안 말도 안 통하는 그녀가 남긴 일부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순해 보이지만 젊은 그녀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울 남편, 사정이 있어 떠나온 나라, 집, 가족, 무엇보다 말과 글!
마치 공기가 폐를 드나들듯 그녀의 모국어가 그랬으리라.
멀리 뚝 떨어져 천식환자가 억지로 숨을 쉬는 것처럼 얼마나 갑갑할까? 물론 말을 하지 않아도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걸 알긴 하겠지만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제대로 듣지 못하는 두려움은 그녀에게 트라우마로 남지 않을까 싶다.
존재는 부재의 칼날이 다가올 때 빛을 발한다.
안전, 신뢰, 기댈 사람들, 생명, 건강, 이해,
그녀가 가지지 못한 것들이 나에게 주어짐에 감사하여 어느 것 하나 꼬박꼬박 되짚어 보면 나 잘나 된 것은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나 나나 다를 바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들 또한 칼날 앞에 유리처럼 깨지기 쉬운 것임을 모른 채 잠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