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unny Rain Apr 30. 2022

유명한 번역가가 번역한 원고인데, 왜 이 모양...?

출판 편집자를 괴롭히는 방법-17

꽤 오래전 출간됐던, 그야말로 문학계에 가치가 충분한 고전문학을 출간 준비할 때다.

현재 베스트셀러에 있는 책을 번역했을 만큼 그럭저럭 이쪽 계통에서는 이름이 알려진 번역가의 

번역 원고를 받았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다.

번역 상태는 물론이고, 글의 흐름도 뭔가 이상하다. 중간중간 의미가 맞지 않는 단어도 보인다.

결국, 무려 200년 전에 출간된 그 고전문학 원서 파일을 열어 본다. 그리고 원문과 대조해본다.

이상한 느낌이 맞았다.


고전문학은 현대 문학보다 번역이 까다롭다.

현대에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를 사용한다거나, 요즘은 해당 단어의 의미로 쓰지 않는 의미에 사용한다거나...

그래서 번역가는 꼭 영어사전을 옆구리에 끼고 번역해야 한다.

한 단어의 제일 마지막 의미가 고전문학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대표 의미로 사용되곤 한다.

아무리 봐도 이 단어가 맞지 않아 보이는데, 영어사전을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알맞은 의미를 찾아서 진땀이 흐르곤 했다.


전해받은 그 고전문학을 번역한 번역가는 문장의 흐름을 꼼꼼히 보지 않고 

그냥 단어의 첫 번째, 또는 두 번째 의미로 해석해 놓았던 것이다.

그 문장에서는 세 번째, 또는 네 번째 의미로 해석해야 할 단어를 단지 현재 잘 알려진 의미로 가져다 붙인 것이다.

아, 한탄이 스며 나온다.


게다가 고전문학은 한 문장이 굉장히 긴 경우가 많다. 엄청나게 많은 수식어와 that, what, which, and, but의 향연이다. 그야말로 고전문학은 수사의 문학이자 철학의 문학이다. 한 문장이 반 페이지에 달하고, 한 단락이 두 페이지를 넘어가기도 한다. 번역가는 이처럼 긴 문장을 어떻게 번역해야 할까? 그냥 그대로 길게 늘여 놓으면 될까? 아닐 테다. 적당히 끊어줘야 한다. 그리고 접속어로 잘 이쁘게, 그러면서도 군더더기라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이어줘야 한다. 그게 참 어려운 일이다. 


아, 문장을 일일이 보는데, 심지어 한 문단은 원서와 완전히 다르게 번역해서 들어가 있다. 

원문을 보니 굉장히 쉽지 않은 문장으로 보인다. 

어쩌면 번역가는 하도 번역이 잘 안 되니, 완전히 엉뚱한 내용을 가져다 붙인지도 모르겠다. 

그냥 흐름상 대략 이런 내용이겠거니 하면서...

아이고, 머리야...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번역가의 실력이 떨어지는 걸까?

명성만 있지, 실력은 꽝인 걸까?

그러나 아마도 그 번역가의 실력은 나무랄 데가 없을 것이다.

사실 잘은 모른다. 유명하니까 그럴 거라고 생각할 뿐.

어쩌면, 너무 일에 치이다 보니 고전문학은 만만히 보고 설렁설렁 번역한 건 아닐까?


열심히 일하는 번역가 중에는 한 달에 서너 권씩 자기 이름으로 출간하는 걸 보기도 했다.

보통 한 권 제대로 번역하는 데 세 달은 주는데, 이게 어떻게 된 건가, 싶은 때도 있다.

기본적으로, 그 정도 기간을 요구하기도 하고,

분명히 한 권(200자 원고지 1,000매) 번역에 석 달은 걸린다는 게 일반적인 수준이다.

초벌 번역 한 달 반, 다듬는 데 한 달 반, 해서 석 달은 잡아야 한다고 편집자로서 생각하기도 한다.

거기다 기술 번역이면, 석 달 가지고는 부족할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한 달에 세 권을 번역해 출간하는 걸까?


사실, 대략적으로 그 이유에 관해 들은 이야기가 있으나 노 코멘트...


저렴한 번역비에 고전문학이라고 대충 했을 리는 없겠지만...

책에 자기 이름이 들어가는데 괜찮은 걸까?

물론 편집자들이 개고생 해서 다 잡아내고, 수정하겠지만...

출간 일정 때문에 재번역을 요청할 수도 없고, 편집자는 그냥 그 원고를 떠안고 재번역에 들어가야 한다.

번역 전문가가 아닌 편집자가 재번역하는데, 일정 안에 책을 출간할 수 있을까?

출판사에서도 자연스레, 편집자에게 일이 넘어간다.

영문과 출신에다가 번역 회사를 다녔다는 이유로...

밤새워 일해야지 뭐... 편집자라는 직업을 가진 벌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출판 편집자를 괴롭히는 방법-16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