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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하실주인 Mar 11. 2020

나는 언제부터 눈 오는 날 우산을 챙기기 시작했을까.

먼 훗날 내가 지금의 나에 대해 할 말이 줄어간다.

소복소복 눈이 쌓인다. 그 위를 다시 새 눈이 덮는다.

어제부터 새벽 내내 내렸는지 발자국을 명확하게 남길 정도로 쌓여있다. 출근길 뽀드득 거리는 소리를 즐기며 아직 개척하지 않은 눈밭을 마음껏 걸었다. 오랜만에 눈을 보고 눈밭을 걸어본다.


눈 오는 풍경 속 거리를 걸으면 묘하게 설렌다. 눈에 관한 옛 추억들을 떠오르게 해서 일까. 유년시절, 으레 것 눈 오는 날 동네 친구들과 눈사람을 만들었던 것이 떠오른다. 그때의 인연들과 지금 이 거리에서 눈사람을 만드는 장면을 상상한다. 설렌 마음 확인이라도 하듯, 장갑을 끼지 않아 시린 손으로 보닛에 쌓인 눈을 뭉친다. 가로수를 향해 던져 본다.


자연은 어디서나 공평하듯, 눈은 그 높디높은 회색 담장을 뚫고 들어와 소복이 쌓여있다. 수평을 이루며 고요히 쌓여있는 것을 보니 아직 수용자 일과 시작 전인가 보다. 나는 스케이트를 타듯 미끄러져 걸었다. 발로 최대한 많은 눈을 거두며 길을 만들었다. '내 뒤로 출근하는 사람은 이 길로만 걸어라'라는 메시지를 남기며...... 오늘따라 쇠창살을 사이로 많은 시선이 느껴진다. 수용자들도 눈 내리는 오늘이 좋나 보다.


아침부터 보안 청소 공과가 시끌시끌하다.

“가위 바위 보” 기합이 들어간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린다.

자기네들끼리 무슨 순서를 정하고 있나 보다.

“뭐 때문에 이렇게 시끄럽냐?”

“부장님 나오셨습니까?”

“아침부터 왜 가위바위보야?”

“아 오늘 쓰레기 버리러 가는 사람 정하고 있었습니다. 근데 제가 이겼습니다!”

S가 이겼단다.

“그래 그럼 갈 사람 따라와”

그런데 S가 따라온다. ‘음?’

“이겼다며?”

“네. 오늘은 이긴 사람이 쓰레기 버리러 갑니다. 이럴 때 눈을 맞아보지 언제 맞아보겠습니까.”  

눈 오는 날은 쓰레기 버리러 가는 것도 신이 나나 보다.


"눈 때문에 오늘 바닥이 지저분하다. 좀 더 신경 써서 걸레질 하자!"

보안 청소 담당이 눈 때문에 바닥 청소를 더 잘하자고 지시했다. 눈을 머금은 신발을 털어내도, 현관매트에 쿵쿵 발도장 찍으면서 아무리 털어내도 결국엔 바닥에 검은 얼룩을 만들어냈다. 보안청사 바닥을 보니 온통 물기와 검은 얼룩들이다. 눈은 설렘과 동시에 불편을 동반했다. 직원들은 막히는 도로 사정으로 인해 평소보다 다소 늦게 출근했고, 눈길에 미끄러졌는지 허리를 어루만지며 고통스러워하는 직원들도 보였다. 수용자들은 눈 오는 날 더 열정적으로 운동 시간을 갖고 싶어 하지만, 직원 입장에서 사고위험이 높기에 여간 까다로울 수밖에 없다.  


눈에 대한 설렘과 동시에 끔찍했던 기억들도 떠오른다. 여섯 겹을 껴 입어도 뚫고 들어오는 시린 바람, 아무리 제설작업을 해도 다음날이면 무릎까지 쌓였던 눈, 방한 양말 겹겹에 털 부추를 신어도 뚫고 들어오는 바닥의 냉기, 모두 평창 올림픽에 파견 갔을 때 기억들이다. 올림픽 파견을 마치면서 '내 인생에 다시는 평창을 떠올릴 일은 없으리'라고 다짐을 했건만, 혹독한 추위는 살갗에서 기억으로 어느새 넘어갔나 보다. 끔찍함이 이제는 추억으로 남는다. "내가 평창에서 말이지...." 지극한 추위와 눈은 내게 영웅담을 남겼다.

눈 오는 풍경 속 거리를 걸으면 묘하게 설렌다. 눈에 관한 옛 추억들을 떠오르게 해서 일까. 유년시절, 으레 것 눈 오는 날 동네 친구들과 눈사람을 만들었던 것이 떠오른다. 그런데 내 기억 속 추억들은 눈 오는 날 지금의 나처럼 우산을 들고 있지 않았다.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눈 오는 날 우산을 챙기기 시작한 것이.

지금의 불편함을 피하기 위해 훗날의 추억을 희생하기 시작한 것이.

삶의 낭만을 편안이라는 나태함으로 태워버린 것이.


눈 발이 날리는 어느 날, 창문으로 눈 오는 풍경을 감상한다. 씻고 옷 갈아입기 귀찮아서 창문을 통해 감상하는 걸로 만족해한다.


먼 훗날 내가 지금의 나에 대해 할 말이 줄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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