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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이앤 Jul 10. 2020

랭보와 베를렌, 그리고 압생트

영화 <토탈 이클립스>




21세의 젊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출연한 영화로 유명하기도, 1995년에 동성애를 파격적으로 다룬 것으로 유명하기도 한 영화이다. 20년도 전에 이런 퀴어 영화가 나왔던 것에 놀랐고, 중간 중간 배우들의 과감한 노출 장면 연출에 놀랍기도 했다. 또한 베를렌의 부인 마틸다를 폭력적으로 대하는 베를렌의 행동 연출에 대해 헛웃음이 나기도 했다. 물론 마틸다와 베를렌의 관계 고증을 위한 목적이 있었겠지만, 만약 1995년이 아닌 2020년에 이 영화가 태어났다면 비판의 목소리는 피하지 못할 것이고.







영화의 전개가 다소 산만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감독이 서사의 매끄러움과 개연성의 측면 보다는 랭보와 베를렌의 관계에 대한 기록 고증에 충실하고자 했다는 의도에서 납득이 갔다. 가상의 이야기 없이 실제 일화 그대로를 옮겨 놓았다는 점에 놀랍기도 하가. 이처럼 파격적이고, 찬란하기까지 한 삶을 살아냈다는 것이 믿겨지지가 않았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소설보다 소설 같은 진한 여운을 남긴다.



랭보는 비평 수업에서 공부해보았던 시인이라 친숙한 이름이었지만, 베를렌은 영화를 통해 처음 접하게 된 시인이었다. 랭보가 현대시에 있어 큰 위상을 지닌 시인이라는 점은 알고 있었지만, 동성을 사랑했던 시인이었고 험난한 방황의 삶을 살았던 사람이라는 것은 처음 알게 되었다. 충실하고 디테일한 고증을 해낸 영화 덕분에, 프랑스 현대시에서 빠뜨릴 수 없는 두 시인의 삶과 내면을 생생하게 이해해볼 수 있었다. 랭보의 전반적인 일대기 보다는 그의 동성애에 초점이 비교적 더 맞춰진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랭보와 베를렌의 관계보다 랭보의 방황적인 삶에 대해 더 많이 다뤄졌다면 어떨까 생각이 들기도 했다. 뮤지컬에도 랭보와 베를렌의 관계를 다뤘던 작품 <랭보>가 있는데, 그 뮤지컬에는 랭보와 베를렌의 삶을 지켜보는 랭보의 가까운 친구 들라에라는 존재가 나오기도 한다. 랭보의 삶은 짧지만 찬란하고 드라마틱하기에, 앞으로 랭보의 삶을 다루는 콘텐츠가 더 나올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 또한 든다.





제목 ‘토탈 이클립스’의 뜻은 개기 일식과 월식을 동시에 가리키는 단어이다. 랭보와 베를렌이라는 서로 다른 존재들이 만나 잠시 하나가 되었다가, 다시 멀어지는 모습을 암시하는 제목으로 읽혀진다. 영화에서 랭보는 베를렌에게 아프리카의 해를 보고 싶다는 말을 꺼낸다. 둘의 관계가 절정에 이를 때, 그리고 관계가 악화되고 있을 때 둘 사이에는 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처럼 해라는 소재는 랭보의 강렬하고 젊은 내면을, 세계를 초월하고자 하는 욕망을 상징하기도 하는 듯하다.






아직까지도 여운이 남는 장면 연출과 대사들이 있다. 영화 중 베를렌이 랭보의 사랑을 확인하고자 하는 대화가 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해달라는 베를렌의 요구에 랭보는 좋아한다는 말로 답한다. 랭보는 베를렌에게 손바닥을 내밀으라고 말하고, 베를렌의 결혼반지를 응시하다가 칼로 손바닥을 찌른다. 위 장면에서는 베를렌과 마틸다의 관계를 증오하는 랭보의 시기심이 드러난다. 영화의 끝자락 중, 노년의 베를렌이 죽은 랭보를 눈앞에서 떠올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의 환상에서 젊은 랭보는 마찬가지로 손바닥을 내밀으라고 말한다. 이 장면에서 랭보는 손바닥을 칼로 찌르는 대신, 입을 맞춘다.



마찬가지로 영화의 끝부분에 바람이 부는 언덕에서 걸어가는 랭보의 장면이 있다. 그는 새하얀 옷을 입고, 새하얀 깃발을 든 채로 영원을 찾았노라 말한다. 아마도 죽은 랭보의 영혼을 그려낸 장면일 테다. 랭보는 태양이 바다와 만나는 그 곳이 영원이라고 말한다. 영원을 쫓던 랭보의 아득한 깨달음이 영화에서 적절한 톤으로 표현된 것 같아 좋았던 장면이었다. 이 영화의 엔딩 장면은 랭보의 시 「영원」을 모티프로 하여 만들었다는 것을 알고 나니 더 인상 깊었다. ‘나는 다시 보았다. / 무엇을? 영원을. / 그것은 푸른 바다에 녹아드는 붉은 태양.’, ‘인간적인 관습으로부터 / 단절된 재촉으로부터 / 너는 여기서 갈라진 채로 / 그리고 네가 원하는 곳으로 날아오르라’ 「영원」중 좋았던 구절이다.








랭보와 베를렌의 생애





아르튀르 랭보의 어머니는 남편과 별거했고, 랭보의 아버지 대신 가장 노릇을 했다. 영화에서 나온 것처럼, 그의 어머니는 차갑고 엄격했다. 랭보는 이러한 가정 안에서 반항심과 저항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초기 시에 그러한 내면이 드러난다. 16세였던 1869년, 랭보의 첫 작품 「고아들의 새해 선물」이 세상에 나오고, 수사학 교수인 조르주 이장바르와 만나게 된다. 랭보의 시세계는 그로부터 큰 영향을 받는다. 1870년, 랭보는 고답파의 거장 테오도르 드 방빌에게 시를 보내 문단에 오르고자 하지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보불전쟁과 파리 코뮌의 와중에 랭보는 가출을 세 번 하고, 그 때마다 스승 이장바르의 도움으로 고향에 돌아왔다. 랭보의 초기 시는 대부분 이 쯤 탄생되었다.



1871년부터 그는 독창적인 시를 쓰고자 마음먹는다. 당시 파리 문학계에서 유명했던 베를렌에게 편지를 하고, 그를 만나게 된다. 영화에서처럼, 랭보보다 10살이나 많은 베를렌은 가정이 있음에도 랭보의 천재적인 면모를 동경하며 그와 함께한다. 그러나 둘의 성향은 잘 맞지 않았기에, 결국 좋지 않게 헤어지게 된다. 베를렌과 헤어진 랭보는 고향으로 돌아가 『 지옥에서의 한 철』은 유일한 산문 시집을 내놓는다. 랭보는 이후에도 다른 시인과 유럽 지역을 방황하고, 사후에 나올 시집 『일뤼미나시옹』을 써낸다. 그의 나이 25세였다. 그는 글쓰기를 멀리하고 유럽, 중동, 자바 지역을 방황하며 노동자로 살기도, 아프리카에서 무기 거래 업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37세 때 암이 심화되었고, 프랑스에서 다리 절단 수술을 받고 사망한다.



랭보는 반항자와 방랑자, 다시 말해 ‘보헤미안’ 그 자체였다. 랭보는 그의 초기 시 「나의 방랑」에서, 자신을 이렇게 써내기도 한다. ‘난 쏘다녔지, 터진 주머니에 손 집어넣고, 짤막한 외투는 관념적이게 되었지’, ‘내 단벌 바지에는 커다란 구멍이 났었지. 꿈꾸는 엄지동자인지라, 운행 중에 각운들을 하나씩 떨어뜨렸지. 내 무막은 큰곰자리에 있었고, 하늘에선 내 별들이 부드럽게 살랑거렸지’, ‘하여 나는 길가에 앉아 별들의 살랑거림에 귀 기울였지’. 젊은 나이의 요절은 그의 삶을 비극적으로 만들었지만, 그가 떠난 자리에는 자유와 영원의 시들이 아름답게 남아있다.






랭보와는 달리, 베를렌은 풍족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가족의 맹목적인 사랑을 받으며 자랐고 명민하지만 버릇없이 성장했다. 고등학교를 다니며 시와 소설에 몰입하기 시작했고, 법대에 진학했음에도 문학에 계속 몰두했다. 베를렌은 보험회사, 파리 시청의 직원으로도 일했고, 친구의 이복여동생 마틸드 모테와 혼인하게 된다. 1871년 파리 시민 혁명 정부 코뮌이 수립되고, 베를렌은 그 곳에서 홍보 일을 하지만 두 달 만에 코뮌이 진압된다. 코뮌 측에서 일을 했다는 이유로 처벌받을까봐 두려웠던 베를렌은 외가 친척들의 집에 은신하다가 시청으로부터 파면 당한다.



이때 즈음 랭보로부터의 편지를 받고, 베를렌은 자신의 처가 집에 그를 불러들인다. 그리고 베를렌은 랭보, 그리고 마틸드와의 관계에서 망설이게 된다. 영화에서처럼 베를렌과 랭보와의 권총 사건이 일어나고, 베를렌은 형무소에 수감된다. 그는 벨기에 몽스 감옥에서 가톨릭 영성체 의식을 치르기도 한다. 그는 석방된 후 교사 일을 하며 시를 썼고, 다시 파리 문학계에서 이름을 날리게 된다. 베를렌은 랭보처럼 깊은 병세에 시달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산문집, 시집, 희곡 등 작품 활동에 열중하며 프랑스 문단을 대표하는 자가 되었다. 그는 젊은 문인들에게로부터 ‘시인의 왕’이라는 칭호를 받기도 한다. 이후 베를렌은 52세에 병으로 사망한다. 랭보처럼, 그는 스스로를 ‘저주받은 시인’이라고 일컫었을 정도로 굴곡진 삶을 살았고, 프랑스 낭만주의와 상징주의의 과도기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선구자였다.






무한한 미지를 꿈꿨던 시인, 랭보



랭보는 초현실주의의 선두자이며, 후대의 많은 현대 예술가에게 영감이 되어주었던 시인이었다.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야 한다”, “절대적으로 현대적이어야 한다” 등의 말에서 느낄 수 있듯, 랭보는 창조적인 변화와 한계로부터의 도약을 중시하는 의욕적인 영혼의 예술가였다. 앞에서 다뤘듯, 랭보는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고, 방랑과 반항의 시간들은 그의 시세계에 그대로 투영되었다. 머물러 있는 것을 경계하고, 늘 새로운 무언가를 향해 역동적으로 떠나고자 했던 랭보의 여정을 시에서도 마주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했던 초기 시 「나의 방랑」에는 어디론가 하염없이 떠나고, 눈부신 사랑과 아름다움을 꿈꾸는 화자-랭보가 있다. 그가 「나의 방랑」을 썼던 시기는 고답파 시풍의 영향을 받았던 시기이자 랭보만의 독자적인 시세계를 구축해내기 이전이며, 다른 초기 시들처럼 탐미적인 경향이 묻어있기도 하다.



랭보의 반항과 방랑은 어떤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까. 그것은 관습과 체제에서 벗어나고 그 누구도 닿지 못했던 ‘미지’를 추구하고자 하는 욕망이지 않을까. 관습과는 반대되는 세계를 향한 욕망, 움직임이 반항과 방랑이라는 이름으로 드러난 것일 테다. 랭보는 실존적인 인간으로서, 그리고 주체적인 시인으로서 끊임없이 나아가고자 했다.



랭보의 초기 시에서는 역동적인 이미지가 자주 사용된다. 이러한 이미지는 현실의 견고한 대상들을 파괴 및 해체하며, 삶과 언어의 한계를 넘고자 했던 시도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려는 의지, 그리고 불안정하지만 어딘가로 부단하게 진동하고 있는 광경을 우리는 목격할 수 있다. (여담으로, 영화에서 늘 새로움을 추구했던 랭보가 세상의 견고성을 깨닫는 대사가 인상적이었다. ‘더 이상 쓸 말이 없다. 세상이 너무도 오래되어 모든 건 이미 쓰였다.’ 관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그의 열망을 깊이 느낄 수 있었던 대사였다.)



랭보는 우아하고 고상한 시 쓰기를 거부하고, 극도로 힘겨운 정신적, 육체적 노동으로 시 쓰기를 실천했다. 랭보에게 있어서 시 쓰는 행위란 ‘극한으로 밀어붙이는’ 노동이었으며, 이러한 시각은 시에 대한 이전의 일반적인 인식(낭만적인 결)과는 확연히 다르다.『일뤼미나시옹』(1886)은 이러한 그의 의지가 담긴 미완성 산문시집이다. 랭보는 이 시집에서 눈으로 관찰되는 현상들의 장면과 일심동체가 된 나, 즉 ‘실험적인 나’를 드러낸다. 시인은 시 속에서 탄생중인 이미지들과 불가분리의 관계로 존재하며, 이 메타시적인 이미지는 다시 객체화되어 독자의 눈앞에 영사된다. 그의 시에서 표면적 이미지는 시적 주관성의 객관화, 주체와 객체의 결합, 내면성의 외향화, 심층적 자아의 파열 등으로 계속 전이되기도 한다.





베를렌의 서정적인 시세계



베를렌은 19세기 프랑스 상징주의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그는 소년시절 보들레르의 감수성에 큰 영향을 받아, 섬세하고 암울한 시세계를 구축해냈다. 그는 ‘음악의 시인’으로 알려지기도 하였으며, 프랑스 가곡의 발전에 큰 역할이 되기도 했다. 베를렌의 시는 나직하고도 친숙한 어조가 특징이며, 리듬이 강하면서도, 단순한 표현을 지향했다. 시어와 형식을 세련되게 다듬고, 단어의 반복을 통해 음악성을 부여했다. 시의 음악성을 중시했던 베를렌의 관점을 그의 시「시법」에서 읽을 수 있기도 하다. 그는 시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뉘앙스를 아직도 원하기 때문이다. / 색깔이 아니라 오직 뉘앙스를! / 오! 뉘앙스만이 오직 결합시킨다네, / 꿈과 꿈을, 플루트와 뿔피리를! (… )’



베를렌의 시는 비교적 짧은 길이를 이루고 있기에, 특정한 정황이 담겨있지 않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베를렌의 시가 쉽게 쓰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는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하고 본질적인 요소들만을 남기는 것을 중시했다. 그는 자신의 단순성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정확하되 현학적이지 않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듯이 보이게 하는 효과는 분명 가장 위대한 시인의 고되고도 오랜 연습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처럼 그의 시는 ‘단순’하기보다는, 강박적인 수준으로 정제된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베를렌의 시적 양상은 시대적 맥락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베를렌은 개인의 감정을 중시하던 낭만주의 사조와, 예술을 위한 예술을 중시하던 파르나스 시파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낭만주의는 감정에 매몰된 결과, 장황해지는 경향이 있었고, 파르나스 시파는 조화와 균형에서 오는 형식미에 매몰된 결과 시적 감동이 결여된다는 점이 있었다. 베를렌은 이 두 가지 경향에서 중립을 지켜냈다. 감동과 개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시의 형식 또한 존중했다. 베를렌을 비롯한 상징주의자들은 시구를 해방시키기 위한 시도를 하기도 했다. 홀수각의 시, 다양한 시구 걸치기, 산문시 등 다양한 실험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를렌은 시구의 전통을 크게 벗어나거나 틀을 깨부수지는 않았다. 우리가 베를렌의 시에서 눈여겨볼 수 있는 것은 형식과 의미가 아닌, 감정 그 자체이다. 베를렌의 험난한 삶에서 비롯된 우울과 불안의 감정은 형식에도, 의미에도 얽매어 있지 않고 리듬을 통해 물처럼 흘러간다.



베를렌의 굴곡진 삶이 남겨낸 방황과 갈등, 시련은 미묘한 음악적 효과를 통해 정밀하게 표현될 수 있었다. 베를렌의 친구였던 위스망스의 소설 『거꾸로』의 주인공은 베를렌의 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베를렌의 독창성은 막연하고 감미로운 비밀을 유연한 목소리로 어렴풋이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베를렌만이 어지러운 영혼의 건너편에 있는 확실성을 예측할 수 있었다. 사고의 극히 나지막한 독백, 조용히 중얼거리는 단절된 고백, 그 숨결의 신비에 의하여 부추겨지는 우울을 담고 있었다.’



랭보가 착란, 광기, 환각을 통한 파괴와 방랑의 시를 썼다면, 베를렌은 음악적인 요소를 통해 내면의 리듬을 드러냈다. 베를렌은 랭보가 그랬듯 비참한 삶을 시에 녹여냈지만, 랭보처럼 새로운 세계와 언어를 이끌어내기 보다는 그가 서 있는 세계와 언어를 끌어안고 통곡하는 시인이었다.









영화를 보고 녹색의 압생트에 매료되었다. 한 번 마셔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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