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키타카 소설론
2006년 월드컵, 스페인 대 튀니지와의 축구 경기 해설을 하던 방송인은, FC 바르셀로나가 짧은 패스로 경기를 풀어나가는 전술을 본 후 ‘티키타카’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다. 그가 본 ‘티키타카’는 골키퍼 이외의 10명의 선수가 패스를 받을 위치를 잡고 끊임없이 많은 패스로 경기를 풀어나가는 전술이었다.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은 철저하게 ‘티키타카’로 무장하여, 2010년 월드컵에서 통산 1번째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축구 중계에서 쓰이기 시작한 ‘티키타카’는, 대화가 원활하고 유쾌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한다. 대화하는 사람들의 합이 잘 맞아, 짧게 주거니 받거니 하는 즐겁고 끈끈한 대화를 보고, 우리는 ‘티키타카가 좋다‘라고 말한다. 쉽게 풀이 죽거나, 어느 한쪽이라도 어긋나는 대화에는 티키타카가 존재하지 않는다. ‘티키타카 적‘인 대화는 맥이 끊기지 않으며, 흐름에서 어긋난 말들이 나오지 않는다. 이야기를 나누는 상황에서 티키타카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의도와 흐름을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말하는 이의 눈을 마주치고,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듣지 않는다면 공을 주고받을 수 없다. ‘통하는’ 대화를 잘하기 위해서는 잘 듣는 것이 우선이며, 말하는 이가 어떤 말을 어떤 의도로 하는지 잘 파악해야 한다.
소설은 작가와 독자의 대화고, 대면이다. 대화하는 상황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반드시 필요하다. 따라서 작가 없는 독자는 없으며, 독자 없는 작가란 역시 상상하기 힘들다. 작가와 독자는 서로에 의해 존재하며, 각자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한다. 소설가가 독자를 의식하지 않는다면, 그의 작품은 차라리 벽을 향해 웅얼대는 독백에 가까우며, 그는 분명 자신의 소설이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할지 헤매고 있을 소설가일 것이다. 반면 독자가 소설가의 의도와 메시지를 감상하고 질문해보지 않는다면, 그는 소설을 읽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탐구해볼 의지가 없는 게으른 독자로만 남을 것이다.
소설 작품을 사이에 둔 작가 혹은 독자가 제 역할에 충실하지 않다면, 그 소설 작품은 ‘티키타카’가 이루어지지 않는 지루한 무인도가 된다. 소설이 무인도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서로의 왕래가 이루어져야 한다. 헤엄을 치거나 크루즈를 타거나, 그 어떤 방식으로든 간에, 작가와 독자는 소설이라는 섬에서 함께 존재해야 한다. 서로를 벗겨내고자 하는 원초적인 욕망을 가지고 전력으로 질주해야 한다. 소설에서 ‘티키타카적’인 순간은 작가와 독자가 서로를 벗겨내는 과정과 결과에서 생기지 않는다. 벗겨내고자 하는 ‘욕망’ 그 자체에서 생겨난다.
작가는 소설을 이루는 인물과 사건, 배경 등에 숨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독자에게 말을 건다. 독자가 지루해하지 않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몰입할 힘은 작가의 역량에 달려 있기에, 작가는 몽상가보다는 전략가여야 한다. 전략을 철저히 세운 소설은 유혹적이다. 그렇기에 소설의 전략은 독자를 설득시키고 공감시키기 위한 것이 관건이다. 아무리 뛰어난 개성을 드러내고, 유려한 문체를 가지고 있어도, 독자가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그것은 좋은 전략이라고 보기 어렵다. 작가는 독자가 몰입할 수 있는 지점을 영리하고도 집요하게 물고 떨어져야 한다. 작가 자신도 자신의 소설에 이입하여 어지러움을 느낄 수 있을 만큼 말이다. 작가는 자신의 독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소설 독자의 몰입은 공감에서 생겨난다. 공감, 참 익숙한 단어다. 모든 면에서 공감을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인물과 배경, 사건이 현실감을 가질수록 소설은 독자의 세계와 닮아가며 독자를 자연스레 소설로 이끈다. 작가는 독자의 세계를 잘 이해하여, 그들의 삶에서 필요한 메시지를 끌어내야 한다. 독자들에게 의미 있게 다가오는 메시지는 쉽게 도출되지 않는다.
조개가 자신을 아프게 하는 이물질을 끌어안고, 점차 단단해지면서 진주를 만들어내는 과정처럼, 작가는 독자들의 현실을 끌어안고 아파보아야 한다. 너무 아프고 슬퍼서 이리저리 굴러보아야 하며, 때로는 너무 유쾌해 배꼽을 잡고 꺽꺽거려 보아야 한다. 이물질과도 같은 현실의 비극과 그럼에도 존재하는 소소한 기쁨을 통과하며 작가 스스로만의 알맹이를 낳아 보아야 한다. 알맹이가 있는 작품은 독자들이 금세 알아차리기 마련이다.
작가가 낳은 알맹이에 공감한 독자는, 그제서야 소설을 자신의 방식으로 읽어낸다. 독자의 내면에 소설의 시공간이 자리를 잡고 흡수될 때, 그에게는 이제 새로운 차원의 감각이 주어진다. 그 감각은 이차원적이지도 않다. 삼차원적이지도 않으며 사차원적이지도 않다. 언어로부터 시작된 문학적 차원의 감각이다. 이 감각이 느껴지기 시작할 무렵, 소설의 활자는 활자의 역할만 해내지 않는다. 독자가 몰입하고 있는 순간을 무한하게 부풀려낸다. 소설의 인물에 감정을 이입하고, 마치 자신이 소설에 있는 것 마냥 인물들의 갈등을 받아들인다. 자신에겐 새로운 세계를 만나거나 기존의 세계를 부수어보기도 한다. 능동적인 독자일수록, 소설 곳곳에 숨겨진 작가의 메시지를 발견하며 황홀한 경험을 가져본다.
정리하자면, 작가는 소설이 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잘 ‘구축해서’-잘 ‘전달해야’ 한다. 참 쉽다. 독자는 소설이 무얼 전달하고자 하는지 잘 ‘잡아내서’-잘 ‘느껴야’ 한다. 작가와 독자가 각자의 역할을 ‘잘’ 한다는 것은, 서로의 맥락과 의도를 보다 깊고 입체적으로 파악해보고자 하는 의지에서 시작된다. 서로를 마주보고-벗겨보고 싶은 욕망이 깊을수록 작가와 독자의 티키타카는 확장된다. 그럼으로써 소설은 존재 의의를 굳혀간다.
* 19년에 제출했던 학교 과제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