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경,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새빨간 표지와 제목의 비속어는 시집의 강렬한 첫인상을 준다. 하지만 맹렬하고 ‘차가운’ 첫인상과는 다르게, 시집은 행성의 내핵처럼 깊고도 뜨거운 시인의 내면을 바탕으로 둔다. 싸늘하고 회의적인, 때로는 비판적이고 가끔은 따스하고 슬픈 언어들이 있다. 어느 특정한 결에 집중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시집을 한 문장 혹은 한 단어로 정리해보기가 쉽지 않았다. 제목처럼 ‘차가운’ 시집이라고 말해보기엔 조금은 ‘따스한’ 시집이기도 한 것 같고, ‘심장’처럼 ‘살아있는’ 시집이라고 해보기엔 ‘죽어있는’ 무언가가 종종 등장하고 있다. 그렇기에 (굳이) 이 시집을 한 문장으로 말해보자면 ‘빌어먹을 세계에 울리고 있는 목소리’ 라고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여러 화자들은 어떤 장소에 놓여 있고, 무언가를 보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에게 잠시 빙의되어 그의 시선을 잠시 갖는다. 추상적인 이미지들과 자연, 죽음과 같은 거대한 단어들이 자주 등장하지만, 화자가 마주하고 있는 시공간과 그 속에서 움직이는 것들이 손가락에 닿을 듯 선명하기에 시의 정서를 한없이 가까이서 마주할 수 있다.
공간적인 배경이 섬세하다. 시인이 그려내고 있는 시공간에 초점을 맞추어 그 속에서 흐르는 문장들을 따라갈 수 있었다. 나의 도시, 공원, 극장, 철도와 같은 일상적이고 비좁은 공간이 있는 반면, 흑해, 지중해, 비행장, 사막, 황무지, 들판과 같은 낯설고 광대한 공간이 있다. 공간들은 현실적이지만 몽환적이기도 하며, 이국적이기도 하지만 어제 가보았던 곳처럼 익숙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종이를 넘길 때마다 화자가 어느 공간에서 움직이고 있을지 미리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공간들이 무작위로 흘러가고 있다. 어느 한 곳에서 정착하지 않고 다양한 공간으로 떠내려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어서, 시집을 읽는 동안 보다 확장적인 시야로 시들을 대할 수 있었다.
비틀어진 언어들은 한 눈에 들어오지 않지만, 정서는 어렵지 않게 잡아낼 수 있다. 그렇기에 시인은 독자로 하여금 시집에 이입할 여지를 의도한 것 같다. 화자의 담담한 어조는 터져 나오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는 듯 하고, 어쩌면 체념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세계의 모든 것을 마침내 깨달아 버린 듯한 단정적인 문장들은 세계를 향한 시니컬한 시선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사랑과 같은 믿음을 포기하지는 않고 있는 태도를 느낄 수 있었다. 시집의 정서는 개인적이기보다는 보편적이다. 어쩌면 거대하다. 화자의 시선과 목소리는 사적이지만 우리가 모두 공유하고 있었을 감정들이 드러난다. 그 감정들이 ‘원시적’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안정적인 상태에서 비롯되는 사랑과 기쁨, 축복과 같은 감정보다는 불안이 진동하고 있는 상태에서 비롯되는 공포와 두려움, 슬픔과 같은 감정들이 주를 이룬다.
시인은 시집을 통해 ‘세계의 안녕’을 그리고 싶었던 것일까 궁금증이 들었다. 이 속수무책한 세계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그래서 지금 다들 안녕한지 묻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