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이앤 Jul 22. 2020

지금, 여기 착란의 기록

이영주,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





 물렁물렁하고 낯선 세계를 구축해내는 언어들, 누구나 겪어보았을 절망과 슬픔의 감정을 예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전달하며 감정의 울림과 몰입을 극에 달하게 하는 시들이 있다. 시의 어떤 구간에서도 시인은 잠자코 말들을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리고 앞 문장이 형성하는 어떤 틀에 갇혀 있을 여지조차 주지 않고, 읽는 이의 마음과 머리의 방심했던 한 구석을 콕 찌를 수 있을 만한 지점을 찾아 움직인다. 이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익숙할 수 밖에 없는 아픈 순간들을 익숙하지 않은 문법과 감각으로 그려낸다.



나쁜 하루를 보내고, 말도 안 되는 이상한 꿈들을 꾸어내고 난 후의 멜랑꼴리한 느낌. 너무 슬퍼서 머리가 무겁게 아프지만, 오히려 개운하기도 한 느낌. 이영주의 시집은 그런 감상을 하게 해 주었다.


 이영주 시인은 중독적일 만큼 독특하고 세련된 플로우의 언어를 구사한다. 상식적인 문법을 극적으로 파괴하고 부정해내는데, 힘이 들어가 있지 않고 오히려 천연덕스러워서 그가 그려내는 세계에의 몰입을 자연스럽게 유도한다. 시인은 대체로 첫 문장에서 화자의 상황을 친절하게 보여주고, 독특한 상상으로 등장했던 정황을 비틀어내고 다양하게 변주하며 예상치 못하게 정황을 극적으로 주물럭거린다.



정황을 틀에 갇히도록 놔주지 않고 무한히 진행해내는 시인의 상상력은 주목할 만한데, 그보다는 그 상상들을 다뤄내는 문법에 대해 더 눈길이 갔다. 먼저 써낸 문장과 그것을 받아 쳐내고 확장해내는 문장 사이의 거리감이 밀접하지 않고, 문장을 연결하는 핵 혹은 연결고리의 존재가 모호하게 느껴지지만, 문장의 진행은 위화감이 없고 힘까지 있다. 문장들은 계속해서 미끄러지는데, 그것이 무의미하게 흘러가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다.



언뜻 보았을 때, 문장들은 일정하지 않은 거리감을 유지하며 파편적으로 흘러가는 듯하다. 계속 곱씹어 보면, 문장들은 다양한 형태로 중첩되고 있었다. 앞 문장을 뒷 문장이 부정하고, 앞에서 활용했던 감각과 이미지를 무력화시키거나 꼬아낸다. 어떤 풍경에 있을 법한 상황들을 갑자기 ‘있을 법하지 않은’ 상황으로 변주시키고, 풍경 속 화자는 그러한 상황들을 기록하다가, 기록한 페이지를 찢어버리고 독자를 피해 어딘가로 꽁꽁 숨어 버리는 듯하기도 하다.                   



시집에서 볼 수 있는 또 다른 특징은, 시인이 시의 정황을 결코 ‘가라앉게’ 놔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비현실적이거나 낯선 정황을 초반에 제시하고, 그것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며 괴롭힌다. 그는 마치 지구 한 바퀴를 돌아도 끊이지 않는 스트링 치즈처럼, 정황들을 늘려나가고, 이어나간 정황들을 처음 본 것처럼 낯설게 받아친다. 정황들은 처음 탄생했던 지점에서 완전히 다른 카테고리로 이어지거나 처음의 등장과는 다른 그림자를 남긴다.

매거진의 이전글 현대인의 몽타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