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감 : 유행
첫아이의 이름은 엄마가 지었다. 누나, 아내도 당시 인기가 많은 예쁜 이름들을 냈었다. 그래서 정원이는 소윤이도 혜원이도 될 수 있었지만, 엄마의 강력한 의지로 정원이가 되었다. 정원이라는 이름 자체가 부르기도 들리기도 예쁘다는 엄마의 주관적인 생각과 생년월일과도 궁합이 잘 맞는 이름이라는 이유에서다. 나도 정원이라는 이름이 유행을 타지 않고 가벼우면서 무겁고, 특히 남성성과 여성성을 겸비한 중성적인 이름이어서 좋았다. 누나와 아내는 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지만 나는 딸아이가 소윤이나 혜원이가 되었다면 연약하고 착하기만 한 아이가 될 거 같은 생각이 들었는데, 최종적으로 정원이가 되어서 씩씩하고 자기주장을 적극적으로 하는 아이가 될 수 있을 거만 같았다.
엄마는 정원이를 정원이로 만든 거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는 듯했고, 나는 그런 엄마를 보면서 엄마가 정원이라는 이름을 좋아하는 이유와 내가 좋아하는 이유가 어쩌면 같은 데서 시작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아버지의 교통사고로 30세에 일찍 과부가 되었다. 옛날에는 남편이 일찍 죽으면 “남편 잡아먹은 년 ”이라고 해서 일찍 과부가 된 것도 서러웠지만 주변의 시선도 곱지 않았다. 친가가 서울에 있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우리 가족은 경상도에서 서울로 올라왔으나, 친가 쪽에 도움을 받는다거나 만나는 일은 아주 드물었다. 아마도 새 출발을 위해 새로운 환경이 필요했던 거 같다.
엄마는 생활력이 아주 강한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서울에 올라와 강해진 건지는 알 수 없으나, 내 유년시절 엄마는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엄마가 서울에 올라와 제일 먼저 한 것은 공장 인부들을 대상으로 식당을 했는데 간혹 공장에서 일하는 아저씨들과 시비가 붙어도 엄마는 절대 물러서는 일이 없었다. 엄마는 돈을 버는 데에 많은 노력을 했다. 식당으로 돈을 좀 번 후에는 당시 유행했던 선물의 집, 한 때 핫했던 닭갈비집, 목포에 연고가 없었으나 목포 회집을 10년이나 운영했다. 회집 장사가 어려워지면서 주방장을 내보내고 직접 열 손가락에 밴드를 붙여가며 회 뜨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 지금은 정부에서 지원해주는 무료교육과 창업지원을 받아 꽃집을 10년째 하신다. 50명이 받은 교육과 창업지원에서 실제 꽃집을 차린 사람은 엄마밖에 없다. 엄마는 젊은 사람들이 만드는 세련되고 깔끔한 꽃다발 포장은 못하지만, 엄마만의 풍성하고 정성이 담긴 꽃다발 포장을 만들어낸다. 엄마는 돈이 안 되는 꽃씨와 퇴비도 가게에 비치하는 걸 신경 쓴다. 보통 어르신들이 꽃씨와 거름을 때때로 찾기 때문이라 했다.
엄마는 힘들게 살았지만 긍정적인 사람이었고 베풀 줄 알았다. 식당을 할 때 명절이 되면 나에게 꼭 혼자 계신 이웃 어르신에게 손수 만든 떡국 배달을 시키셨다. 가게에 소아마비에 걸린 형이 자주 찾아와서 수세미를 팔았는데, 내 엄마에게 그 형은 정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엄마, 엄마 했다. 엄마는 자주 수세미를 사주려고 했고, 친아들이 옆에 있었지만 그 형에게는 엄마의 호칭을 기꺼이 허락하였다. 돌아가신 아빠의 막내 남동생이 소아마비였고, 유독 엄마에게 잘해줬다 했는데, 그 형을 보면 생각난다 하며 마음 아파했다.
엄마는 대장부다. 일찍 남편을 잃어서 나와 누나에게는 아빠도 되고 엄마도 되었다. 냉정하고 각박한 세상에 순종하지 않고, 정당하게 땀 흘리면서 열심히 부딪히며 살았다. 엄마는 글로 배우는 데에는 익숙하지 못했으나, 현장에서 몸을 부딪히며 배우는 데에는 탁월한 학생이었다. 뒤늦게 운전면허도 따서 전국 방방곡곡을 차 끌고 다니고, 독수리 타법으로 컴퓨터를 배워서 꽃집 블로그에 간단한 글도 올린다.
나는 엄마를 많이 닮았다. 짙은 쌍꺼풀에 동그란 얼굴이 닮았고, 긍정적이고 착한 거 같은데 가끔 똥고집을 심하게 부리는 것도 닮았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성인이 되고 나서는 안 해본 일이 거의 없다. 야간 편의점 알바가 대학생활을 뒷받침해주는 나의 20대 메인 잡이었고, 패밀리 레스토랑 설거지, 새벽시장 막노동, 경복궁 수문장, 중식당 웨이터, 호주 워킹홀리데이, 중국에서 한국어 학원 강사 등 엄마를 닮아 새로운 일을 하는데 두려워하지 않고 강한 생활력을 발휘하며 살아왔다.
그래서인가 보다. 첫째가 태어났고 아이의 이름을 지으면서 엄마와 나는 바랬던 거 같다. 이 각박한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씩씩하고 적극적으로 세상에 부딪혀가며 자신의 삶을 개척해가는 그런 아이가 되길 무의식적으로 원하고 있었던 거 같다. 엄마가 오랜 세월 동안 삶으로 증명해왔던 거처럼, 지금 내가 그렇게 헤쳐나가고 있는 거처럼 말이다.
#유행#아이 이름 짓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