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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를로스 안 Aug 03. 2022

가슴이 시려왔다

글감 : 사라지다

출근하자마자, 부사수가 회의실에서 면담을 요청했다. 아직 거래처와 늦게까지 먹은 술이 깨지 않아 몽롱한 상황에서 순간 찝찝한 느낌이 든다. 부사수는 신입사원으로 들어와서 나와 1년 3개월째 같이 일했고, 회의실에서의 면담 신청은 처음이었다. 분명 아주 중요한 이야기이다. 회의실까지 걸어가는 발걸음에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긴장이 된다.


과장님, 말씀드리기가 그런데, 시간이 얼마 안 남아 하루라도 빨리 말씀드려야 할 거 같습니다. 다른 회사에 가게 되었습니다.(당황하는 나를 보며) 저도 너무 갑작스럽게 말씀드린 거 같아 난처하네요.


아아, 그렇구나. (아침까지 안 깬 술이 한 번에 깬다) 이유를 좀 물어봐도 될까?


부사수는 좀 더 큰 회사에서 일해보고 싶었다고 했다. 신입사원으로 가게 되었고, 출근 날짜가 정해져 있어 시간이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다고 했다. 시간은 괜찮다 안심시켰고, 이직한다고 하니 섭섭한 마음이 크지만, 원하는 곳에 가게 된 거에 대해서 축하한다고 어른스러운 척 말을 하고 함께 회의실을 나왔다.


그다음은 퇴사의 과정이 그렇듯, 팀장과 상무의 보고를 거쳐 퇴사의 행정적인 절차는 급속도로 진행됐다.  


부사수에게 말했다. 근무 마지막 날까지 아무 일 없는 듯 평소처럼 일하고, 마지막 날 저녁 술 한잔하면서 조촐한 송별회를 하자고 했다. 회사를 떠난다고 말한 날부터 실제 회사를 떠나는 날까지 당사자들은 상당한 불편함과 어색함을 느낄 수 있다. 간혹 배신자가 된 느낌이 들어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질 수 있다. 그래서 부사수가 덜 불편함을 느끼며 첫 회사의 업무와 사람들과 유종의 미를 거두길 바라는 마음에 그렇게 말했다.


이상하게도 그날 이후부터 가슴 한쪽이 아팠다. 주말 내내 가슴 한쪽이 아리는데, 왜 갑자기 가슴이 시려오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다만 아주 오래전에 이렇게 한쪽 가슴이 시려온 적이 있었다는 것만 어렴풋이 떠올랐다. 아주 오래전 그 사건과 부사수의 이직 선언이 어느 지점에서 닿아 있는 것인지 깨닫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회사는 해외에 지사를 두고, 한국산 소재를 글로벌하게 수출하는 일을 메인으로 하고 있다. 예상치 못하게 대리 1년 차 발령이 나서 4년간 중국에서 근무하고 복귀했더니 어느덧 과장이 되어 있었다. 으레 10년 이상 일하게 되면 많은 부사수를 받게 되는데, 일찍 해외 지사에 나가면서 부사수를 받을 기회가 없었다가 복귀 후에 10년 이상 나이 차가 나는 신입사원을 첫 부사수로 받게 되었다.


신입사원을 부사수로 받으면서 마음먹은 것이 있다. 사회생활의 첫 경험이 향후 사회생활에 절대적인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단순히 업무를 가르쳐주는 것보다는 업무를 배우는 태도, 비즈니스의 본질, 조직의 원리 같은 부분을 체험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물고기를 잡아주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 잡는 법을 알려주기로 했다.


부사수는 체구가 작은 편에 똘망똘망했다. 수학능력이 좋아서 짧은 시간 내 업무에 적응했다. 좋은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배우려는 겸손한 자세, 맡은 일에 책임을 다하고, 경청하되 자기 의견을 숨기지 않았다. 책을 좋아하는 취미가 같아서 나이 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 잘 통했다. 잔업을 할 때 기형도 시인의 시와 인생에 관해 이야기하며 정서적 일치감을 맛보기도 하고, 사회현상에 관심이 많은 부사수에게 책을 추천받기도 했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관계란, 사회 또는 조직이 부여한 관계를 뛰어넘는, 삶을 살아가는 동반자 관계라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부사수와는 그럴 수 있을 거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호흡이 잘 맞던 부사수가 갑자기 이별을 통보했다.


아주 오래전 가슴이 시렸던 일은 여자 친구에게 이별을 통지받았던 때 느낀 것이었다. 기억에서 사라질 뻔했는데, 이번 부사수의 이직 선언으로 기억의 저편에서 긴급 소환되었다. 기억은 사라진 거 같지만 우리의 몸속 깊은 어딘가에 숨어 지내다 때가 되면 나타나 우리를 놀라게 한다. 여자 친구의 결별 통지와 부사수의 이직이 연결되는 것이 조금은 당황스러웠지만, 그만큼 내가 부사수를 많이 좋아하고 아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음은 몸을 통해 말한다. 부사수의 이직을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몸은 바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거 같다. 가슴이 시린 이유를 깨닫고 나서 아내에게도 이야기하고, 부사수에게도 직접 고백을 했다.


네가 이직을 말한 그다음 날부터 이상하게 가슴 한쪽이 아프고 시렸어. 이런 감정을 아주 오래전 느낀 적이 있는 거 같아 생각해봤더니 옛날에 실연당했을 때가 그랬었어.


부사수는 웃으면서 과장님 왜 그러세요라고 하며 당황해했다. 갑작스러운 고백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사랑하는 부사수와의 사랑을 인정하고 그를 쿨하게 보내주었다. 가장 쿨한 건 쿨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나도 아주 쿨하게 인정하고 고백했다. 고백하고 나니 마음은 편해졌다. 부사수는 이직을 준비하는 복잡한 마음 안에서도 차근차근 첫 회사에 대한 정리를 잘 해내 갔다. 거래처에 전화해서 이직에 관해 설명을 하고, 내부적으로도 인사를 드리며 다음 회사생활에 대한 조언을 얻기도 했다.


회사 생활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헤어진다. 누구는 말한다. 회사는 이해관계에서 만난 사이이기 때문에 가까워지는  좋지 않다고. 회사를 나가면 끝이라고 생각하여 사람을 직급과 직위 안에서만 보려고 한다. 나는 생각이 다르다.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차지하는 회사생활에서 마음을 터놓을  있는 사람   사귀지도 못한다는  우리의 인생에 너무 슬픈 일이다. 그리고 사람은 직급, 지위라는 작은 울타리로 절대 이해할  없는 우주 같은 존재이다. 회사를 나가고 나면 만남의 횟수가 줄어들고   없는 이유로 다시 만나기 어려울  있다. 만나지 못한다고 해도 우리가 함께한 추억과  기억들은 사라지지 않고, 우리 가슴에 남아 나의 일부분이 된다. 비록 이제 회사에서 떠나 다른 곳에서 열심히 사는 사람들, 이제는 연락하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함께 했던 시간 동안 삶의 든든한 추억을 만들었다면 각자의 가슴속에 남아 삶을 살아가는  선한 영향을  거라 믿는다. 지금은 연락할  없는 나를 아껴주신 외할머니처럼, 그때 받은 사랑과 추억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소중한 나의 일부가 되었다.


내 몸 한쪽에 살고 있는 사랑하는 내 부사수, 모쪼록 새로운 회사에서의 건투를 빈다.


#부사수#가슴이 시리다#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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