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집중해서 듣고 있었을 뿐이다. (feat. 자비명상)
1. 듣기 훈련
자비명상 훈련 중 듣는 훈련이 있다.
상대방이 말을 하면 상대의 말에 내 말을 얹거나 어떤 리액션 없이 온전히 듣기만 한다.
공감을 평소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에게는 너무 어색했고 자동으로 튀어나오는 리액션 때문에 애를 먹었다.
리액션을 안 하고 내면의 목소리를 누르니 내 눈이 상대방을 보지 못하고 주위를 빙글빙글 돌아다녔다.
듣기 훈련의 목표는 대화중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는 반응을 절제하고 순수하게 듣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리액션과 솔루션을 제시해야 한다는 압박에 진정한 듣기가 안된다는 것이다.
2. 우연히 만난 듣기 훈련의 효과
아침마다 두 아이의 손을 잡고 등교를 시킨다.
둘째 아이는 등교 길에 갑자기 생각이 났는지, 받아쓰기 시험 연습을 안 했다고 짜증을 부리다 울상이 된다.
첫째 아이는 둘째가 짜증을 부리는지 우는지 상관없이 자기 이야기에 열심이다.
나는 잠자코 둘째와 첫째의 이야기를 듣는다. 둘째의 짜증이 점점 커져 울음이 된다.
무언가를 말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지만 침묵을 유지하고 둘째 아이를 본다.
평소 같았으면 둘째 아이에게 이런 잔소리를 했을 거 같다.
“받아쓰기 시험은 자주 있는 거야, 울정도로 중요한 일이 아니야.”
“세상엔 크고 중요한 일이 있고, 작고 사소한 일도 있어, 받아쓰기 시험은 작고 사소한 일이니 가볍게 넘겨야 해.”
나의 관점에서 다다닥 이야기하면 아이는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이를 보며 답답해하는 악순환의 패턴을 밟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우선 듣기만 했다.
첫째가 묻는다. “아빠, 오늘 왜 이렇게 조용해, 아무 말도 안 해?”
내가 대답한다. “둘째가 받아쓰기 연습을 못했다고 괴로워해서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어.”
학교가 가까워진다. 나는 둘째에게 편안한 목소리로 말한다. “우리 라원이가 받아쓰기 시험을 잘 보고 싶은 마음이 크구나”
둘째는 조금 더 찡찡거리다 잦아든다. 학교 앞 신호등 앞에서 우리는 헤어진다.
3. 소감
대화를 하는 과정 중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는 내 관점을 말하는 것을 멈추어 보았더니 상대방(아이)이 보였다.
아이의 짜증과 울음에 공감하되 공감해서 괴로워지지 않았다. 아이의 짜증과 울음의 이면에 있는 욕구와 필요가 살짝 보였다.
온전히 듣는다는 건 이런 것일까? 무언가 괜찮은 걸 찾은 느낌이다. 온전히 듣기에 대해 더 음미하고 파보고자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