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발력, 살아있네

백일백장 스물다섯

by 민희수

나에게 타고난 능력이 있다면 단연코 순발력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운동을 잘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달리기를 잘했고 고무줄놀이도 꽤 잘했다. 매일 아파트 놀이터에서 놀면서 단련된 것도 있으리라. 다만, 공으로 하는 운동은 좀 약했다.

열아홉 살 무렵, 한국체대에 가서 몇 가지 체력 테스트를 받을 기회가 있었다. 그날의 모든 테스트가 기억에 남는 건 아니지만 순발력 테스트 장면은 아직도 선명하다. 모니터 앞에 발판을 두고 서 있다가 모니터에 빨간불이 들어오면 발판 밖으로 양발을 재빨리 옮겨야 했다. 운동을 전공하는 남자 학생들까지 포함해서 열댓 명이 참여했는데 나는 그중에서 반응 속도 3위를 기록했다. 이어서 뒤돌아서 소리를 듣고 반응하는 순발력 측정이었는데 결과는 거의 비슷했다. 어린 시절부터 나름 ‘재빠른 아이’였기에 그냥 그러려니 했었다.

그 후로 나는 이 에피소드를 가끔 꺼내며 “순발력이 나의 큰 재능인데, 도대체 어디다 써먹지?” 하고 웃곤 했다.

오늘은 오랜만에 잠실에 갔다. 쇼핑몰을 구경하다가 여행가방 팝업 행사장에 사람들이 모여 있길래 궁금해서 가보았다. 직원의 설명을 들으니 타이머를 보다가 정확히 10.00초에 버튼을 누르면 여행가방을 주는 이벤트였다. 순간 오래된 기억이 떠오르며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몇 사람들의 시도를 지켜봤다. 다들 아깝게 실패였다. 드디어 내 차례. 타이머가 9초를 넘어가면서 나는 초집중 모드에 들어갔고 마침내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결과보다 먼저 들려온 건 직원의 탄식이었다.

“아—!”

9.99초.
딱 0.01초 차이였다. 너무도 아쉬웠지만 그 짜릿한 순간에 내 순발력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게 왠지 뿌듯했다. 직원은 “진짜 아깝다”며 사진이라도 찍어가겠느냐고 물었다. 여행가방은 얻지 못했지만 그 자리의 많은 도전자들 중 가장 근접한 기록을 세운 1등으로 당당히 행사장을 나섰다.

가방은 놓쳤지만 내 안에 아직도 반짝이는 감각이 살아있다는 걸 확인한 재미난 경험이었다.

기분 좋은 패배였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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