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삭제 모드

백일백장 서른

by 민희수

성당에서 해설 봉사를 하던 중, 갑자기 불쾌한 기억이 확 몰려왔다. 그야말로 ‘이불킥’하게 만드는 떠올리기 싫은 장면이었다. 기도 중에 다른 생각이 스치는 것을 ‘분심이 든다’고 하는데 이게 단순한 분심인지 아니면 시험에 든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순간 마음이 크게 흔들렸지만 다시 집중해야 했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기억이 사실이든 왜곡된 것이든, 무의식 속에 잠들어 있던 게 나온 만큼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지워버릴 기회일수도 있겠다는 것. 예전에 명상할 때 블랙홀이나 휴지통을 떠올리며 불필요한 기억들을 쓸어 담아 없애는 연습을 한 적이 있었다. 물론 기억이라는 건 겹겹이 쌓여 한 번에 깨끗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지워버리겠다’고 마음먹으면 당분간은 떠오르지 않았다.

오늘도 그렇게 그 순간을 지우개의 기회로 삼았다. 그리고 나니 불쾌함은 놀랍도록 금세 사라졌다.


아마도 좋지 않은 기억은 완전히 지울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처럼 그 기억을 주인이 아닌 손님으로 대하고 잠시 머물다 조용히 보내줄 수 있다면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 해설을 마치고 성당 문을 나설 때 마음 한켠이 한결 맑아진 걸 느꼈다. 아마 이게 신앙이 주는 선물일지도 모른다. 기억은 여전히 내 안에 있지만 그 기억을 대하는 내가 달라진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나를 붙잡을 힘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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