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어느 주말 오전, <블가리 컬러즈> 전시회를 관람하기 위해 서울 예술의전당에 갔습니다. 선선하고 화창한 아침이었습니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처럼 고속도로도 한산했습니다. 아내와 딸과 끝말잇기, 수수께끼 놀이를 하다 보니 금방 예술의전당 건물이 눈앞에 보였습니다. 주차장에 자리도 많고 콧노래가 절로 나왔습니다.
'일찍 오니까 기다리는 사람도 별로 없네.'
매표소에서 표를 사고 직원의 안내를 받아 아래층에 줄을 서러 내려갔는데 입이 쩍 벌어졌습니다. 웬걸,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이렇게 많을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ㄷ자 모양으로 길게 늘어선 줄 끝에 서서 멍하니 있었습니다. 아무리 못해도 1시간 30분은 기다려야 할 것 같았습니다. 전시를 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할 정도였죠. 하지만 이미 표를 구매했고 예술의전당까지 왔으니 전시를 보고 싶었습니다. 결국 기다리기로 정했습니다. 아내와 딸에게 벤치에 앉아서 쉬거나 주변을 둘러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아내와 딸은 내 곁을 떠났고, 나는 무엇을 할까 궁리하며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습니다. 고민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길지 않았습니다. 곧장 메모장을 실행했습니다. 엄지손가락으로 스크롤을 내리며 글감을 훑어봤습니다.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신기합니다. 글을 쓰기 전까지만 해도 줄이 짧아지지 않았는데, 글을 쓰기 시작하니 대기 줄이 금방 줄어듭니다. 다리가 저릴 때에는 무릎을 굽혔다가 폈지만 눈은 스마트폰에서 떼지 않았습니다. 양 엄지손가락을 바삐 움직였습니다.
한 편이 글이 완성되는 속도만큼 줄이 짧아졌습니다. 이내 전시회장 입구까지 도착했습니다. 글을 다 썼습니다. 저 멀리 보이는 아내를 향해 손을 흔들었습니다. 아내가 딸과 함께 다가오더니 말했습니다.
"혼자 기다리느라 힘들었지?"
입과 머리가 다르게 대답합니다.
"응, 힘들더라." ('아니, 혼자 글 써서 너무 좋았어')
나만의 시간을 얻어 글을 써서 좋았습니다. 딸을 데리고 놀러 간 아내에게 고마웠습니다.
직원에게 티켓을 보여주고 전시관에 입장했습니다. 형형색색의 보석이 우리를 반깁니다. 글을 다 쓰고 전시회를 보니 마음이 보석처럼 반짝거립니다.
저는 어쩔 수 없이 시간을 보내야 할 때 글이 잘 써집니다. 집에 있을 때보다 밖에 있을 때 글이 더 잘 써질 때도 많습니다.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거나, 간식을 먹는 등 선택지가 많을 때보다 마땅히 할 수 있는 게 없을 때 글쓰기에 더 집중합니다. 출퇴근길,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간, 어딘가에 걸어갈 때 글쓰기에 빠집니다.
당신은 자투리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나요? 하루의 빈틈에 글을 쓰는 것만큼 개운한 일이 없습니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순간을 기다리세요. 기다리는 시간을 글쓰기로 채워보세요. 기다리는 시간은 짧아지고 충만함으로 가득한 시간은 늘어납니다.
자투리 글쓰기, 빈틈 글쓰기를 권합니다.
호주머니에서 새어 나가는 시간을 글쓰기로 채워보세요. 글을 쓰는 만큼 마음이 따뜻함으로 충만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