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슬램덩크를 좋아한다. 학창 시절에 틈만 나면 슬램덩크를 봤다. 잊을만하면 보고, 잊을만하면 또 봤다. 지금까지 족히 열 번은 넘게 완독했다. 내게 슬램덩크는 읽을 때마다 새롭게 느껴지는 <어린 왕자>와 동급이다.
슬램덩크의 주인공 강백호는 농구의 '농'자도 모르는 풋내기지만 탁월한 운동신경, 체력, 투지를 겸비했다. 농구부 주장 채치수는 그런 강백호에게 리바운드를 가르친다.
리바운드란 골대를 맞고 튕겨 나온 공을 잡아내는 것을 뜻하는 농구 용어다. 멋지게 득점해서 소연이에게잘 보이고 싶은 강백호는 리바운드를 하찮게 생각한다. 채치수는 강백호에게 말한다.
"리바운드를 제압하는 자가 시합을 제압한다."
2019-2020년 우리나라 프로농구 필드골 성공률은 51.4%이다. 슛의 절반은 골대를 맞고 허공에 뜬다. 우리 편이 공을 잡으면 공격 기회가 한 번 더 생긴다. 반대로 상대 편이 공을 잡으면 공격 기회가 넘어간다.
리바운드는 우리 편의 공격 기회를 늘리면서 동시에 상대편의 공격 기회를 뺏는 일이다. 공격 기회가 늘어나니 경기에서 이길 확률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지사. 채치수의 말은 옳았다.
책 쓰기에서 농구의 리바운드와 같은 것은 초고 쓰기다. 초고를 써야 책 쓰기라는 시합에서 이길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다. 아무리 훌륭한 기획을 해도 원고를 쓰지 않으면 책을 만들 수 없다. 초고가 없으면 퇴고를 할 수 없고, 원고를 투고할 수 없다.
초고는 엉덩이로 써야 한다고 많은 작가들이 말한다. 진부한 이야기이지만 정설이다. 엉덩이는 마음의 힘을 상징한다. 엉덩이로 쓰라는 것은 마음을 부여잡고 끈질기게 글을 쓰라는 것을 뜻한다. '무거운 엉덩이 같은 마음'에는 여러 덕목이 담겨있다.
컨디션이 나쁠 때도 꿋꿋이 모니터를 응시하며 글을 쓰는 꾸준함.
다른 일을 제쳐두고 글 쓰는 시간을 최대한 확보하려는 집념.
책을 쓰겠다는 초심을 잃지 않고 스스로 되새김질하는 끈기.
한 권 분량의 원고를 완성할 수 있다는 자신감.
이런 마음의 힘이 모여 한 편의 원고를 향한다.
책을 출간한 뒤 지인들에게 어떻게 하면 책을 쓸 수 있냐는 질문을 종종 받았다. 초롱초롱한 그들의 눈빛을 보며 뭔가 그럴듯한 대답을 해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대답은 항상 비슷했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책을 쓸 수 있어요. 좋아하는 주제로 열심히 글을 써서 책 한 권 분량의 원고를 쓰면 돼요."
최대한 친절한 뉘앙스로 답변했지만, 문장으로 써놓고 보니 아주 불친절한 대답처럼 보인다. EBS 그림 프로그램의 화가 밥 로스가 "어때요, 참 쉽죠?"라고 하는 것 같이.
책 쓰기에 왕도는 없다. 엉성한 글이든 모난 글이든 신경 쓰지 않고 와구와구 쓰는 게 최선이자 최고의 방법이다.
글을 쓰지 않을 때는 이따 어떤 글을 쓸지 생각해야 한다. 샤워할 때, 걸을 때, 설거지할 때, 자려고 누웠을 때 등 오롯이 혼자가 될 때는 글 생각을 해야 한다. 생각을 메모하고 컴퓨터 앞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을 때 메모를 글로 옮겨야 한다.
글을 쓰다 보면 무엇이 부족한지 알게 된다. 미흡한 점을 그때그때 보완하면서 글을 이어나가야 한다. 특히 첫 원고라면 책을 쓸 준비를 하고 글을 쓰는 게 아니라, 먼저 글을 쓰면서 책을 쓸 준비를 해야 한다. 흩어진 생각을 글로 정리하면서 사고가 확장되고 글이 또 다른 글을 부르는 걸 체험하게 된다.
초고를 쓸 때는 한없이 고독하다. 누가 도와주거나 격려해 주지 않는다. 내가 스스로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가며 줘야 한다. 책을 쓰려는 마음이 도망가지 않도록 꼭 감싸 안고 한 문장씩 차곡차곡 쌓아야 한다. 마음이 굳건하지 않으면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
강백호는 농구 초보이지만 온 힘을 다해 리바운드를 배운다. 레이업 슛, 점프 슛을 배울 때도 마찬가지다. 지켜보는 사람이 질릴 만큼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신발 밑창이 뜯어지는 것도 모른 채 연습에 매진한다. 만화의 끝 무렵, 강백호는 지난해 전국대회 우승팀을 상대로 리바운드를 계속 따내서 역전의 발판을 마련한다.
강백호의 꾸준함, 집념, 끈기, 자신감은 어떻게 원하는 것을 이뤄야 하는지 보여주는 본보기다. 비록 만화속 이야기이지만 초고를 쓸 때 참고할 만하다.
'책 한 권 써볼까?'하는 마음의 크기가 얼마나 큰 지는 자신만이 안다. 책을 쓰려는 마음이 커진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잡아야 한다. 의욕이 솟아오른다면 이때를 놓치지 않고 초고 집필에 올인하자. 마음을 펜촉처럼 뾰족하게 만들어 단기간에 쓰자. 마음이 늘어져 펜 끝이 뭉툭해지기 전에.
강백호가 공을 향해 손을 뻗고 몸을 날렸듯이, 초고를 향해 스스로 온몸을 글 속으로 던지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