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청, 신이 되는 순간

by 조형근

머리가 깨질 것 같이 아프고 내장이 꼬인 것처럼 속이 쓰리다. 술병이다. 술기운 한가득 담긴 한숨을 쉬며 ‘앞으로 술 안 마신다. 오늘부터 금주다.’라고 선언한다.


3일 지났을까. 편의점에서 500mL 맥주 4캔과 과자를 장바구니에 담는다. '조금 마시는 건 괜찮겠지.'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처럼 각오를 잊어버린다. 그러다 또 하루 숙취로 고생하면 스무 살부터 반복했던 다짐을 다시 한다.


'앞으로 술 안 마신다.'



내게 경청은 숙취다.


잘 들어야지, 잘 들어야지 생각하고, 맹세해도 작심삼일이다. 남의 말을 들으면서 딴생각을 한다. 눈은 상대방을 향하고 있지만 눈빛은 흐리멍덩하다.


상대방도 알 것이다. 내가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고 있는지 아닌지. 나 역시 상대방이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지 아닌지를 느끼는 것처럼.



경청은 대화의 시작이자 끝이며,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행동이다. 듣는 모습은 그 사람의 됨됨이를 보여준다.


듣는 게 중요하다는 걸 잘 알고 있는데도 듣는 건 항상 어렵다. 이야기가 좀 길어진다 싶으면 잡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풀리지 않는 회사 일, 저녁 메뉴, 가십거리가 머릿속을 유령처럼 배회한다.


특히 가까운 사람일수록 듣는 게 더 어렵다. 누구보다 잘 들어야 하는 사람인데 말이다. 오죽했으면 새해 제1 목표로 아내의 말 경청하기를 꼽았을까.




듣기의 고민이 많아서일까. 고미숙 작가의 《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의 한 문장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아리아인은 입으로 한 말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다른 모든 현상과 마찬가지로 말도 신, 즉 데바였다. 그들은 듣는 행위를 통하여 신에게 다가간다고 생각했다.”



듣기가 신에게 다가가는 순간이라니, 무신론자지만 아리아인의 태도를 접하니 한없이 부끄럽다.

그러나 잘 들을 수 있는 힌트를 하나 얻었다.


‘누군가의 말을 들을 때 나는 신에 가까워진다(!)’라고 생각하니 경청이 한결 수월해진다. 위대한 행동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 독려하고 뿌듯해한다.

두 눈은 또렷하게 뜨고

입술은 가볍게 다문 채 옅은 미소를 짓는다.

두 귀는 상대를 지긋이 향한다.

가슴을 펴고 아무 말이나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입은 맞장구치거나 상대의 말에 호응할 때만 연다.


오감을 총동원해서 듣고 싶다. 듣기는 날마다 하는 일이다. 소홀히 대할 수 없다.


오늘도 신에게 한 걸음 다가가겠다.


아내가 잠에서 깨기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