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보다 사람, 그리고 삶
한국의 독서 생태계 현실은 서글프고 기이하다. 일단 유명해지면 대충 써도 책이 팔린다. 안 유명하면 안 팔린다. 이름이 알려진 작가는 설령 원고가 시시하더라도 다음 책을 낼 기회를 비교적 손쉽게 얻는다. 무지막지한 부익부 빈익빈 시장이다.
장강명, 《책 한번 써봅시다》
베스트셀러를 읽다 보면 거만해질 때가 있다.
'이 정도 글은 나도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다 아는 이야기잖아. 별로 특별하진 않은데...'
하지만 내가 그 책과 100% 같은 원고로 책을 출간한다고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을까? 글쎄, 출간 계약이나 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똑같은 글을 써도 유명 작가가 쓴 글은 베스트셀러가 되고 내가 쓴 글은 출간 계약도 어렵다니, 암울한 현실을 탓해야 하나. 그렇지만 어쩔 수 없다. 같은 말을 하더라도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독자는 다르게 받아들인다. 무엇을 쓰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떤 사람이 쓰느냐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대통령과 내가 한날한시에 같은 장소에서 같은 연설문을 낭독한다면 국민은 누구의 연설을 들어줄까. 나라도 대통령의 입을 쳐다볼 것이다. 내가 연설하고 있다는 걸 아는 건 가족밖에 없을 테다.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기까지 치열하게 투쟁했고 각종 허들을 수없이 넘었다. 당에서, 국회에서, 거리에서 철저히 검증받았다. 검증된 자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는 건 당연지사.
나는 국가를 위해 헌신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검증대에 오른 적도 없다. 아무리 식견이 뛰어나고 누구보다 대한민국의 앞날을 걱정한다고 해도 대중은 나의 존재조차 모른다.
유명 작가, 정치인, 연예인, 운동선수가 책을 쓰면 곧잘 베스트셀러가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독자는 그들의 인생 철학, 삶의 자세를 구매한다. 어떻게 한 분야의 정점에 올랐는지 궁금하기에 책을 집어 든다. 내가 동경하는 사람이 어떤 말을 하는지 듣고 싶어서 책장을 펼친다.
베스트셀러를 출간하고 싶으면 베스트셀러에 어울리는 작가가 되는 게 먼저다. 글을 잘 쓴다고 베스트셀러가 될 수는 없다.
가요 프로그램에서 1위 트로피를 받은 가수는 새로운 시도를 해도 팬이 귀 기울여준다. 같은 노래를 신인 가수가 불렀다면 한두 번 듣고 말았을 노래도 유명 가수가 부르면 팬이 인내심을 갖고 들어준다. '뭔지 몰라도 계속 들어보자.'하고 기다린다.
처음 들었을 때는 '이번 곡은 망했나' 싶었는데 자꾸 들으니 귀에 쏙쏙 감긴다. 인기를 얻은 유명 가수는 다시 트로피와 꽃다발을 받는다. 무명 가수 입장에서는 속상할지도 모르겠다.
다르게 생각해보자.
유명 가수는 처음부터 유명 가수였을까? 아니다. 무명 가수로 데뷔해서 숱한 고생을 거쳐 유명 가수의 위치에 올라섰다. 그의 재능과 실력은 증명되었고 대중은 그에게 왕관을 씌워주었다. 이제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불러도 팬은 반복해서 듣는다. 색다른 음악적 해석에 고개를 끄덕인다.
피카소와 같은 그림을 그린들 피카소처럼 인정받을 수 없다. 설령 피카소의 그림과 한치 오차도 없는 그림을 피카소보다 먼저 출품한다고 한들 피카소의 그림처럼 대접받지 못한다.
유명 작가의 글을 읽고 나처럼 '나도 충분히 이렇게 쓸 수 있는데'라고 생각하는가. 실제로 똑같이 쓸 수 있다고 한들 유명 작가의 생각, 철학, 결, 삶의 깊이까지 흉내 낼 수 있을까. 내 삶은 독자의 관심을 부를 수 있을까.
묵직한 글을 쓰기 위해서는 묵직하게 살아야 한다. 남과 다른 글을 쓰기 전에 남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 남다른 삶의 경험이 축적돼야 글의 질량이 커진다. 무거운 글이 물속에 빠지는 순간 글의 파동은 멀리 퍼진다. 독자의 가슴에 닿는다.
베스트셀러의 글보다 베스트셀러의 작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눈여겨봐야 한다. 어떤 하루를 보내고 있는지 들여다봐야 한다. 그와 같은 삶, 같은 하루를 보낼 수 있다면 베스트셀러를 쓰는 것도 꿈은 아닐 것이다.
베스트셀러를 쓰기 전에 베스트셀러 작가의 삶을 살자고 다짐한다. "나는 묵직한 글에 어울리는 삶을 살 자신이 있는가?" 질문의 대답은 10년 뒤에 쓴 책이 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