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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티콘 Jul 22. 2021

숭늉

느림의 미학

나는 커피나 음료수, 차 대신 밥 짓는 내음을 고스란히 우려낸 숭늉을 마신다.

냄비에 물을 중간쯤 붓고 누룽지 한 쪽을 넣은 다음 불을 붙인다. 처음엔 미동도 없던 누른 밥알이 밑바닥에서 달아오르는 열기에 오르락내리락 한다. 유리 뚜껑에 김이 서리고, 수증기가 구멍으로 뿜어져 나오면 연한 밥 누른 냄새가 퍼진다. 투명하던 거품은 탁한 빛을 띠고 천장에 막혀 일그러지다 꺼진다. 밥알이 어느 정도 풀어져 거품이 뚜껑을 들썩일 정도로 걸쭉해지면 불꽃이 보일락 말락 할 정도로 불을 줄인다.


      


밥알이 제 가진 것을 물에 모두 풀어헤쳐 놓을 때까지 무심히 기다리며 숭늉의 유래를 찾아본다.

   

숭늉은 우리 고유의 음료로 언제부터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12세기 초(1103-1104) 중국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에 왔던 손목이 지은 《계림유사(鷄林類事)》에 “숙수(熟水, 숭늉)를 이근몰(泥根沒, 익은 물)이라 한다.”는 표현이 나오므로 고려 초나 중엽에는 이미 존재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나라의 밥 짓기는 일정한 물과 쌀을 솥에 넣고 여분의 물이 없어질 때까지 익혀서 만든다. 가마솥에서 뜸을 들이는 과정에서 쌀의 갈변이 일어나고, 갈변한 누룽지 부분에서 전분이 분해하여 포도당과 구수한 냄새의 성분이 생기게 된다. 우리의 부엌구조는 부뚜막 아궁이와 온돌이 일체가 되어 있고 솥은 고정식이므로 솥을 씻기가 힘들다. 따라서 누룽지에 물을 붓고 끓이면 숭늉을 마실 수 있다. 그리고 솥을 씻는 방법도 되기 때문에 발달하였다는 것이다.

중국은 밥 짓는 방식 차이로, 일본은 부엌 구조 차이로 숭늉이 발달하지 못했고 대신 차 문화가 성행하였다.*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다’는 속담이 있다. 이는 성격이 급한 사람이 서두른다는 뜻이다. 숭늉을 먹으려면 밥부터 지어야 하는데, 밥하기 위해 물을 길어 올리는 우물가에서부터 졸라대는 성급함으로는 결코 맛볼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이다. 숭늉에는 인스턴트가 아닌 느림의 미학이 담겨있다. 


    

숟가락으로 한술 떠서 제법 맛이 난다 싶으면 불을 끄고 냄비를 찬물에 담가 식힌다. 차가워진 숭늉은 깔때기로 식혜 라벨이 선명한 플라스틱 병에 담아 냉장고에 보관한다. 목마른 참에 벌컥벌컥 들이켜도 목 넘김이 매끄러워 마신 바 없는 것 같은데 구수함이 입에 남는다. 숭늉을 마시고 남은 밥알은 거칠한 식혜의 그것과는 다르게 부드러우면서도 감칠맛이 난다. 

나는 이런 숭늉이 좋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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