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음이 우거지기 시작한 오월 중순에 나는 도서관 사람들과 함께 〈길 위의 인문학〉 탐방 일정으로 개심사와 천리포수목원을 찾았다. 그곳에는 초록의 나뭇잎을 갈아입은 나무들이 한창 생명의 활기를 내뿜었다. 그리고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은 팔랑대며 사각거렸다. 그 광경을 보고 있으니 나무들이 서로 무언가를 수런거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상상의 나래를 펴고 나무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귀 기울였다.
개심사의 야단법석
절 마당에 나무들이 모여 자기 자랑을 하느라 왁자지껄하다.
세심동 개심사 표지석에서 이어지는 돌계단의 푸르른 소나무, 절 입구의 감나무, 경지 주변과 절 담장 안의 벚나무, 경지 둘레의 서어나무와 팽나무와 모과나무, 상왕산 개심사 현판을 떡하니 바라보고 선 배롱나무, 절 담장을 이루는 측백나무와 삼나무, 심검당 앞의 목련나무, 명부전 옆의 사철나무 등등.
먼저 벚나무가 나선다.
“너희들, 내가 꽃필 때 얼마나 사람들이 많았는지 잘 봤지? 화려한 내 모습 한번 보겠다고 몰려든 차들로 저 아래 저수지부터 주차장을 방불케 했잖아!”
목련나무도 지지 않는다.
“부처님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꽃이 뭐야? 연꽃이잖아. 나는 나무에서 피는 연꽃이니, 나무에 피는 꽃 중에는 내가 으뜸이지. 부처님 제자 중에 신통 제일인 목련존자가 있고 불경에는 목련경도 있잖아.”
배롱나무가 입이 근질거려 참지 못한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절을 대표하는 나무라고. 스님들은 내가 껍질 벗는 모습을 보며 번뇌와 욕망을 떨치고 수행에만 전념하지. 어렸을 적에 경허스님과 만공스님이 나를 무척이나 귀여워했다고.”
심검당의 휘고 비틀린 나무 기둥이 혀를 끌끌 찬다.
“경허스님, 만공스님이라고? 스님들이 거처하는 요사채가 심검당인 건 잘 알지? 두 스님이 이 절에 오셨을 때 내가 모셨어. 그때마다 자연스러운 내 모습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셨지. 다른 절에 가셨다가도 나를 잊지 못해 오시고 또 오셨다니까!”
그러자 이 나무도 저 나무도 서로 잘났다고 목청을 높인다. 대웅보전 안에서 묵언 명상 중이던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보다 못해 근엄하게 꾸짖는다.
“너희가 허명에 집착하는 중생을 닮아 가려 하는구나. 전도몽상을 멀리하라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그리 설법했거늘.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 견 보살 청이처럼 입 다물고 수행에 매진하거라.”
나무들이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진다.
천리포수목원 추모정원의 추억담
추모정원의 라스프베리 펀 목련나무와 완도호랑가시나무, 그리고 리틀젬태산목이 민병갈 원장을 회상하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라스프베리 펀 목련나무가 옛 기억을 더듬으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때가 1978년이니까, 아마도 수목원을 만들기 시작하고 한 8년 지났을 때일 거야. 외국에서 들여온 목련 씨앗들이 자라는 과정에서 우연한 교배로 발생한 변이종이 바로 나였어. 민 원장님이 나를 선발하여 세계 변종목련 목록에 올렸지. Magnolia x loebneri ‘Raspberry Fun’이라는 멋진 이름으로.
민 원장님 어머니가 발그스름한 내 꽃을 얼마나 좋아했다고. 민 원장님은 우리나라를 너무나 사랑했기에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1979년에 귀화했어. 그래도 민 원장님은 어머니와 이 나라에서 함께 살고 싶어 했는데……. 1996년에 어머니가 펜실베이니아에서 돌아가시고 말았지. 민 원장님은 나를 어머니라고 생각하고 아침마다 문안 인사를 했어. 그때를 생각하면 내 가슴이 아직도 먹먹해. 가끔은 그리움이 사무쳤는지 눈물샘을 적시곤 하셨거든.”
완도호랑가시나무도 아련한 추억에 빠져 말을 받는다.
“나도 1978년에 민 원장님과 인연을 맺었어. 완도로 식물탐사를 온 민 원장님이 나를 발견하고 지른 환호성이 지금도 잊히지 않아. 그때는 내가 어디에도 등록되지 않은 호랑가시나무와 감탕나무의 자연교잡종이었거든. 민 원장님이 ‘Ilex x wandoensis’라는 근사한 이름을 지어주었을 때 나는 비로소 세상에 의미 있는 존재가 되었지. 민 원장님은 부랴부랴 세계식물학회에 공인을 신청하고 내 씨앗들을 세계 곳곳에 보냈어. 그 덕분에 웬만한 외국 수목원에서 내 후손들을 볼 수 있다고 하네.”
2012년부터 ‘민병갈 박사의 나무’가 된 리틀젬태산목은 고인의 유지를 떠올린다.
“민 원장님은 평소에 당신의 묘를 쓸 자리가 있거든 차라리 나무를 한 그루라도 더 심으라고 하셨대. 그래서 돌아가신 지 10년 후에 파묘하고 유골을 화장해서 내 뿌리에 묻었어. 민 원장님은 평생 우리를 사랑했고 우리에게 미안해했는데……. 당신의 가진 모든 것뿐만 아니라 몸까지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주고 가셨네.”
민병갈 원장의 흉상을 바라보며 가만히 듣고 있던 개구리 석상이 나무들에 대꾸한다.
“민 원장님은 너희 나무들만 사랑한 게 아니야. 동물 사랑도 그에 못지않았다고. 뱀이나 거미는 물론이고 송충이까지 함부로 잡지 못하게 하셨다니까! 동물 중에 민 원장님이 제일 좋아한 게 누군지 알아? 바로 나야. 오죽했으면 나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하셨다니까. 좀 있으면 수목원이 개굴개굴하는 소리로 요란하겠지. 내 사연을 아는 이들은 그 소리를 듣고 민 원장님이 여전히 여기에 계신다는 걸 알게 될 거야. 그리고 가만히 떠올려 보겠지. 민 원장님이 이 수목원에 품었던 소망을.”
세상에 똑같은 나무는 한 그루도 없다. 나무마다 겪은 삶의 궤적이 다르다. 나이테가 그 사실을 말해준다. 헤르만 헤세는 ‘나무들은 성스러운 존재여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아는 사람은 참된 삶을 알게 되고 지극한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고 했다. 개심사와 천리포수목원의 나무들뿐 아니라 모든 나무가 그들만의 사연을 가지고 있다. 여러분도 그 이야기들을 잘 들어보기 바란다.
▣ 참고 도서
⋅고규홍, 『절집나무』, 들녘, 2004
⋅임준수, 『나무야 미안해』, 해누리, 2013
⋅고규홍, 『천리포 수목원의 사계: 봄 여름 편』, 휴머니스트, 2014
⋅고규홍, 『천리포 수목원의 사계: 가을 겨울 편』, 휴머니스트, 2014
⋅헤르만 헤세, 『헤르만 헤세의 나무들』, 폴커 미헬스 엮음, 안인희 옮김, 창비,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