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바둑을 잘 두지 못하지만 방송 대국은 즐겨 본다. 케이블 채널에 두 개의 바둑 전문 방송이 있어 이 쪽 저 쪽 돌려가며 보기도 한다. 얼마 전 저녁에도 어김없이 바둑 방송을 시청했다. 이 날은 생중계가 있어서 긴장감이 넘쳤다.
흑을 잡은 선수가 먼저 착점을 했고 백을 잡은 선수가 응수했다. 초반의 포석을 단계를 지나고 중반의 치열한 수 싸움이 이어졌다. 그러던 중 백을 잡은 선수가 착수를 멈칫거리더니 한참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요즘 바둑 대국은 시간 안배가 중요하다. 예전에는 바둑을 하루 종일 두거나 심지어는 며칠에 걸쳐 두기도 했다. 그러나 방송 대국이 주류를 이루면서 흑백 각각 2시간이나 1시간이면 긴 바둑이다. 빨리 두면 시간이 누적되기는 하지만 20초마다 한 수를 두어야 하는 대국도 있다.
백을 잡은 선수의 생각 시간이 길어지자 아나운서가 이런 말을 했다.
“○○○ 선수 착수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장고 끝에 악수를 둔다’라는 말이 있는데 과연 어떤 수를 둘까요?”
그러자 해설 전문 기사가 응수했다.
“그러게요. 생각이 많으면 수가 잘 보이지 않아요. 욕심을 내려놓고 냉정하게 판단해야 할 텐데요.”
결국 백을 잡은 선수가 시간을 많이 들여 착점을 했는데 상황에 맞지 않는 수를 두었다. 바둑의 형세는 급격하게 흑을 잡은 선수 쪽으로 기울었고, 백을 잡은 선수는 시간에 쫓겨 대세를 뒤집지 못하고 허무하게 돌을 던지고 말았다. 대국이 끝나고 복기 시간이 되었다. 흑을 잡은 선수가 문제의 수를 지적하자, 백을 잡은 선수는 머리를 극적이며 다른 데 두어야 했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TV를 끄고 잠시 생각해 보았다. 백을 잡은 선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프로 바둑 선수들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렵다는 테스트를 거쳐 입단한다. 입단 후에도 거의 모든 일과를 바둑 공부에 집중한다. 그런 선수들도 욕심으로 생각이 많아지면 어이없는 수를 둔다. 바둑을 잘 둔다는 것은 그런 수를 줄이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장고 끝에 악수를 두는 건 바둑 선수뿐일까? 나도 종종 이런 상황에 빠지곤 한다. 가령 물건을 사러 가서 이걸 살까 저걸 살까 주저주저하다가 고른 게 나중에 별 소용이 없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가 있다. 결국 첫눈에 들었던 것을 다시 구입한다. 바둑은 다음 대국이 있고 물건은 환불하거나 반품할 수 있다. 그러나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욕심에 눈이 멀어 멈칫거리다 잘못된 선택을 하면 되돌리지 못하고 평생 후회로 남는다. 내 인생에서 그런 순간을 맞이한다면 서슴없이 옳은 선택을 할 수 있기만을 바랄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