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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의 「무진기행」을 읽고

by 메티콘

순천만에 있는 김승옥 문학관은 내가 처음 방문한 문학관이다. 2015년 초겨울의 토요일, 딸이 다니는 중학교의 어머니 독서회에서 준비한 문학기행의 목적지였다. 아내가 독서회원이었고 가족이 함께 가도 좋다고 하여 따라가게 되었다. 문학관에 도착하니 해설사가 김승옥 작가가 계시니 책에 사인을 받아보라고 안내했다. 도서판매대에서 『무진기행』*과 『서울 1964년 겨울』을 급히 구매한 후, 사인을 받기 위해 줄을 섰다. 내 차례가 되어 다가가니, 몸이 불편한 75세의 노인이 책상을 앞에 두고 앉아 있었다. 책들을 차례로 펴자, 작가는 떨리는 손으로 고불고불하게 ‘OOO 선생께 김승옥 2015년 11월 7일’이라고 사인을 했다. 작가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저분이 과연 「무진기행」이라는 단편으로 한국 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분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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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은 작가가 1964년 23세에 발표한 작품이다. 작가는 무능하고 무기력한 현대인을 상징하는 주인공 “윤희중”이 무진에서 보낸 2박 3일 동안의 이야기를 독특한 언어와 문체로 형상화하였다. 이 단편은 작가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한국 문학계에서도 걸작으로 손꼽히며, 문학사적으로도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고 평가받고 있다.


김승옥의 문학은 1960년대 문학사를 공부할 때 굉장히 중요하다. 이는 당시 6.25 전쟁이 끝난 후 발표된, 즉, 최인훈의 『광장』으로 대표가 되는 한국 전후문학 특유의 무기력증과 엄숙주의, 그리고 퇴폐성에서 벗어나 당시 1960년대의 대표상들을 김승옥 특유의 감각적인 문체, 언어의 조응력, 효과적인 공간 선택과 동시에 어우러지는 캐릭터성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문학사 쪽으로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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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평가를 받는 것을 보니, 1960년대 문학계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작품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시대를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단순히 문학평론가들의 평가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1970년에 태어난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내가 김훈 작가의 산문집에서 「무진기행」에 대한 글을 읽었을 때, 그 시대 사람들이 느꼈을 법한 충격을 경험했다.


기라성 같은 청년작가 김승옥이 단편소설 「무진기행」을 발표했을 때, 아버지는 문인 친구들과 함께 우리집에 모여서 술을 마셨다. 그들은 모두 김승옥이라는 벼락에 맞아서 넋이 빠진 상태였다.

“너 김승옥이라고 아니?”

“몰라, 본 적이 없어. 글만 읽었지.”

그들은 “김승옥이라는 녀석”의 놀라움을 밤새 이야기 하면서 혀를 내둘렀다. 새벽에 아버지는 “이제 우리들 시대는 갔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문예 동인지에 무협 소설을 쓰던 김훈 작가의 아버지와 문인 친구들이 「무진기행」의 충격에 빠져 밤새 술을 마셨다고 한다. 젊은 작가 김승옥이 기존의 소설 양식을 답습하지 않고 선보인 새로운 형식의 소설을 읽고, 김훈 작가의 아버지는 전후 기성세대의 퇴장이 임박했음을 외쳐댔다.


1980년, 김승옥 작가는 절필을 선언했다. 작가로서 40세의 원숙기에 접어드는 시점이었지만, 그는 신군부의 검열과 광주 학살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다. 그 이후로 작가는 주목할 만한 작품을 발표하지 못하고 있다. 2003년에는 뇌졸중으로 인해 언어 능력을 크게 잃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졌다. 2004년 세종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직을 사임한 이후로는 간간이 산문집을 출간했다는 소식 외에는 별다른 활동이 없었다. 그가 일으켰던 센세이션을 떠올리면 매우 아쉬운 일이다.


책장 한쪽에서 『무진기행』을 꺼낸다. 책머리에 쌓인 먼지를 훅 불어 내고 차례를 확인한다. ‘생명연습(生命演習) 7 (…) 무진기행(霧津紀行) 197’ 사르륵 책장을 넘겨 ‘무진기행’ 편을 펼친다.


무진으로 가는 버스

버스가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 나는 ‘무진 Mujin 10km’ 라는 이정비(里程碑)를 보았다. 그것은 옛날과 똑같은 모습으로 길가의 잡초 속에서 튀어나와 있었다. (198쪽)

오늘 나는 주인공과 함께 버스를 타고 무진(霧津)으로 떠난다. ‘마치 이승에 한(恨)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은’ 안개가 ‘밤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삥 둘러싸고 있는’ 그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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