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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티콘 Jul 23. 2021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를 읽고

‘밥 유얼’을 돌아보며

 

밥 유얼은 악당이다. 『양들의 침묵』에 나오는 한니발 렉터와 같은 치밀하고 교활한 악한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 밥 유얼의 행동거지는 두려움보다는 멸시감을 자아내게 한다. 사는 곳이라야 흑인들도 더 이상 살지 않는 쓰레기장 부근 오두막이고 생계는 복지 기금의 수표를 받아 연명한다. 게을러 터져 공공사업 촉진국에서 해고를 당하고 쓰레기더미를 뒤지며 생활을 이어간다. 자식들이 학교에 보내는 것은 고사하고 폭행을 가하기 일쑤다. 흑인 톰 로빈슨을 강간하려 했던 딸과 협잡해 도리어 톰 로빈슨을 고소하여 결과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 자기가 잘못한 일을 가지고 핀치 변호사에게 원한을 품고 비열하게 협박을 한다. 자신을 우습게 보이게 했다는 이유로 테일러 판사를 위해하려하고 미망인이 된 헨렌 로빈슨에게 시비를 걸고 욕지거리를 해댔다. 밥 유얼의 죗값은 동정조차 받지 못한다. 술에 취해 핀치 변호사의 아이들을 어둠속에서 해치려 했다 아서 래들리에게 칼에 찔려 죽고 만다. 헥 테이트 보안관은 밥 유얼이 자기 칼 위로 넘어져 죽은 것으로 처리하며 덮어버리고 만다.


하퍼 리는 애티커스 핀치 변호사를 현명하고 인자하고 용기 있는 정의의 사도로 그리는 반면 밥 유얼을 추잡한 놈팡이로 그려낸다. 가엾게 여길 만한 싹은 아예 잘라버려 예수조차 돌을 던질 존재를 만들어 놓았다. 작가가 참 모질다.


나는 그런 밥 유얼의 모습을 보며 그 시대 그 사회가 드러내기 싫은 어두운 면만 얽어 만들어낸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말로는 평등을 주장하지만 뿌리박힌 흑인에 대한 무시와 편견, 대공황 속에 삶에 대한 일말의 희망조차 잃어버린 무력감, 겨우겨우 연명하는 척박한 생활 속에 교육 기회의 박탈에서 오는 무지, 구타당한 아이가 커서 폭행을 가하는 폭력의 대물림과 같이 감추고 싶은 치부가 밥 유얼에게서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앵무새 죽이기』에서 분명 애티커스 핀치와 그 가족이 주인공이고 주목을 받는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에 감동하고 빠져드는 사이에 미처 챙기지 못한 것이 있지 않을까? 밥 유얼의 일면 일면을 닮은 수많은 사람들은 애써 외면하지 않았는지.


*『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지음, 김욱동 옮김, 열린 책들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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