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메티콘 Jul 23. 2021

『노인과 바다』*를 읽고

남획으로 파괴된 『텅 빈 바다』


   


    『노인과 바다』는 어니스트 헤밍웨이(1899~1961)가 1952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헤밍웨이는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이후 10여 년간 이렇다 할 평가를 받지 못했다. 헤밍웨이가 절치부심하며 펴낸 『노인과 바다』는 출간되자마자 독자들과 평론가들에게 뜨거운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헤밍웨이는 이 작품으로 1953년에 퓰리처상을 받았고 1954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소설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쿠바의 한 어촌에 사는 산티아고 노인은 84일 동안 물고기를 잡지 못하는 불운을 겪는다. 하지만 85일째 먼 바다에서 노인의 낚시에 큰 물고기 한 마리가 걸려든다. 노인은 이틀 동안 밤새워 사투를 벌인 끝에 큰 물고기를 잡는다. 잡은 물고기를 배 옆에 묶어 귀항하던 중 피 냄새를 맡고 달려드는 상어들로부터 여러 차례 공격을 받는다. 물고기를 지키기 위해 상어들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지만 남은 것은 살점이 다 뜯겨 나간 거대한 뼈대뿐이다. 항구에 도착한 노인은 녹초가 되어 자기 집으로 돌아가 잠이 든다.  

   

학창시절에 이 작품을 읽었을 때 주로 산티아고 노인에 초점을 맞춰 바라봤던 기억이 남아 있다. 수십 일 동안 물고기를 잡지 못한 가난한 산티아고 노인에게 연민을 느꼈다. 큰 물고기를 잡기 위에 날을 새가며 외롭게 버텨내는 장면들에서는 마음이 아팠다. 상어 떼의 무차별한 공격을 받는 대목에서 안타까움을 너머 분노가 일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도 노인을 위하는  마놀린 소년의 마음씀씀이에 따뜻한 위안을 받았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오십에 가까워진 나는 『노인과 바다』를 다시 펼쳐들었다. 자신의 한계를 생각하는 지천명의 나이와 매스컴의 해양 생태계 파괴에 대한 보도 때문이었을까? 인간의 욕망과 어류 남획이라는 예전과는 다른 시각에서 읽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산티아고 노인을 생계를 위해 물고기를 잡는 가난한 늙은 어부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노인의 말을 들어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물고기를 잡지 못한 지 84일이나 된 날에도 노인은 소년에게 이렇게 말한다. 9월은 “큰 고기를 잡을 수 있는 계절이야.” “큰 고기를 잡으면 그 사람에게 뱃살을 줘야겠다.” 노인은 낚싯줄도 큰 물고기를 잡기 위해 튼튼한 것으로 골랐다. 뿐만 아니라 낚싯줄에는 70미터짜리 밧줄을 두 개씩 달았고, 필요시에 다른 여분의 밧줄과 연결할 수 있게 하여 고기에게 550미터 넘게 줄을 풀어줄 수 있도록 준비했다. 그리고 낚시에 싱싱한 정어리 미끼를 걸어 물속에 드리웠다. 

   

첫 번째 미끼는 70미터가 되는 곳에 내렸다. 두 번째 것은 140미터 되는 곳에, 그리고 세 번째와 네 번째는 각각 180미터와 230미터나 되는 푸른 물속에 내렸다.**

 

180미터나 되는 바다 밑에서 낚시에 걸린 큰 물고기에 끌려가며 노인은 ‘일단 내 계책에 걸려든 이상 어느 편이든 선택하지 않고는 못 배길 거야’라고 생각한다. 또한 노인은 자신이 선택한 방법은 ‘모든 사람이 다다르지 못하는 그곳까지 쫓아가서 그 놈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노인이 큰 물고기에 집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끼가 달린 낚싯줄이 바닷속으로 깊이 내려갈수록 더 큰 물고기를 잡고자하는 욕망이 더 커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 계책을 세우고 세상 끝가지 가보겠다고 하는 노인이 한편으로 섬뜩하기까지 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산티아고가 바다 어딘가에서 더 큰 물고기를 잡기 위해 헤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씁쓸한 마음이 가시질 않는다.   

   

산티아고 노인은 87일과 84일 동안 물고기를 잡지 못했다. 이는 노인이 단지 ‘살라오(가장 운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일까? 노인이 살고 있는 어촌의 모습을 살펴보자   

  

그날 고기를 많이 잡은 어부들은 일찌감치 항구에 돌아와서 잡아 온 청새치를 칼질해 널빤지 두 장에 길게 늘어놓고 두 사람이 널빤지 양쪽에 붙어 비틀거리며 고기 저장고로 운반해 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아바나의 시장으로 생선을 싣고 갈 냉동 트럭이 오기를 기다렸다.***

     

어촌에는 청새치를 손질해 저장하는 고기 저장고뿐 아니라 잡은 상어를 가공하는 상어 공장도 가동 중이다. 상어 공장에서 나는 냄새가 항구를 가로질러 어촌까지 풍겨오기까지 한다. 이미 젊은 어부들 가운데 몇몇은 찌 대신 부표를 단 낚싯줄과 상어 간을 팔아 번 돈으로 모터보트를 사용해 물고기를 잡는다. 물고기 잡이는 상업화되었고 시대의 조류에 재빠르게 편승한 젊은 어부들은 새로운 장비로 물고기를 잡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텅 빈 바다』의 저자 찰스 클로버에 의하면 ‘아메리카의 대서양은 원주민들이 수면 가까이에서 작살을 이용해 황새치 같은 큰 물고기를 잡을 정도로 풍요로웠지만, 유럽인들이 이주한 이래로 후손들에 의해 대어가 남획되었다. 특히 19세기 중반 이래로 산란종 대어의 90% 이상이 사라졌다’고 한다.**** 노인이 수십일 동안 허탕 친 것은 운이 없었다기보다 거의 대부분의 큰 물고기가 이미 바다에서 자취를 감췄기 때문은 아닐까?     

좋은 작품은 읽을 때마다 그 의미가 새롭다.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노인과 바다』도 예외는 아니다. 이번 재회에서 나는 인간의 탐욕과 사라져가는 물고기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인생의 모래밭에서 다시 『노인과 바다』를 만났을 때 내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자못 기대가 된다.

     

* 『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민음사, 2018

** 같은 책, p. 32

*** 같은 책, pp. 11~12    

**** 『텅 빈 바다』, 찰스 클로버 지음, 이민아 옮김, 펜타그램, 2013

작가의 이전글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를 읽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