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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티콘 Jul 22. 2021

포토에세이 『미암일기』를 찾아서!

미암박물관 관람기

미암박물관과 미암 유희춘 

   

미암박물관은 조선 중기 선조초년(宣祖初年)의 명신인 미암 유희춘(眉巖 柳希春, 1513~1577)과 관련된 유물을 관리하는 곳이다. 미암은 해남(海南) 출신이지만 이곳 대곡(大谷)이 처향(妻鄕)이어서 말년에 대대적으로 집을 짓고 안주하였으며, 후손들도 누대세거(累代世居)하였다. 국가지정 문화재인 보물 제260호 『미암일기(眉巖日記)』와 지방지정의 유형문화재 제265호 모현관 고문서(慕賢館 古文書), 민속자료 제36호 미암사당 벽화(眉巖祠堂 壁畵) 등 800여 점의 유물과 복제물 모형물을 수장 전시하고 있다.

미암 유희춘은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인중(仁仲), 호는 미암(眉巖), 별호는 연계(漣溪)이다. 아버지 유계린과 어머니 탐진 최씨 사이에서 2남 3녀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26세에 과거에 급제한 뒤 홍문관 수찬, 무장 현감 등을 지냈다. 1547년에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함경도 종성과 충청도 은진에서 20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1567년에 선조즉위와 함께 복권되었다. 대사성(大司成), 대사간(大司諫), 대사헌(大司憲) 부제학(副提學), 전라감사(全羅監司) 등을 역임하고, 예조, 형조, 이조 등의 참판(參判)을 지내다가 사직하였다. 1577년에 선조의 부름을 받아 상경하여 입궁을 대기하던 중 65 세로 졸(卒)하였다.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고 문절(文節)의 시호가 내려졌다. 

    

출발   

  

푸르름을 가득 머금은 메타세쿼이아가 쭉쭉 뻗을 길을 시원스레 달렸다. 아침에 광주(光州)를 출발하여 창평 읍내를 지나 담양군 대덕면 장산리에 있는 미암박물관(眉巖博物館)에 도착했다. 차를 널찍한 주차장에 대고 보니 9시 10분이었다. 30여 분 남짓 걸렸다. 

    

사진1. 미암박물관 입구

       

사진2. 박물관 안내판

      

박물관 대문 좌측에 안내판이 보였다. 안내판에는 미암박물관과 미암 유희춘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다.      

박물관 대문에 붙은 안내표지판을 보니 관람시간은 오전 10시에서 오후 5시까지이고 매주 월요일은 휴관이란다. 입장료는 무료! 박물관 입장까지 시간이 남아 주변 사적인 모현관(慕賢館), 미암사당(眉巖祠堂), 연계정(連溪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모현관, 미암사당, 연계정

사진3. 모현관

    

모현관은 1959년 지어졌다. 당시 미암사당에 보관돼 있던 『미암일기』를 제대로 보존하기 위해 전라남도와 선산 유씨 문중이 돈을 모았다. 인공연못을 파고 그 가운데 석조 건물로 세웠다. 『미암일기』를 화재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방책이다. 모현관의 당호는 남종 문인화의 대가인 의제 허백련(毅齋 許百鍊)이 썼다. 모현관에 보관되어 있던 『미암일기』를 비롯한 유물들을 지금은 현재 미암박물관으로 옮겨져 보관 전시하고 있다.

모현관은 잔잔한 연못 가운데 조그만 섬처럼 있다. 연못은 연(蓮)이 무성해 연지(蓮池)라 불렸다고 들었는데 6월임에도 수면에는 푸른 하늘만 아른거렸다. 박물관 관장님에게 물어보니 연꽃이 피지 않아 다 걷어냈다고 한다. 연을 다시 심을 계획이라고 하니 내년에 다시 찾아올 때는 무성한 연잎 사이로 활짝 핀 연꽃을 볼 수 있기를. 

      

사진4. 미암종가와 미암사당

    

연지 둘레를 돌아가니 14대 종부가 지키고 있다고 하는 미암종가가 나왔다. 입구에 전서(篆書)로 선산세가(善山世家)를 멋지게 새긴 바위가 눈에 띈다. 종가 마당을 지나 미암사당 앞에 섰다. 조선 광해군 때 세워진 미암사당은 전남 민속자료 제36호로 지정되었으며 미암 유희춘과 부인 송덕봉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사진5. 백학도⋅등룡도⋅봉황도

    

미암 사당의 정면 외벽 문틀 상단에 3개의 벽화가 보인다. 왼쪽부터 백학도(白鶴圖), 등룡도(登龍圖), 봉황도(鳳凰圖) 순이다. 백학도는 미암의 고고한 절의를 나타내고 있으며, 등룡도는 마침내 뜻을 얻어 현관으로 등용되는 화려한 관도를 상징하며, 봉황도는 일가의 화려한 출세도를 상징한 것이라 한다. 미암 유희춘과 송덕봉의 덕을 기리고 후세의 번성을 기원하는 뜻이 아니겠는가.  

     

사진6. 연계정

 미암사당에서 나와 연못 둘레를 마저 도니 연계정이 연지를 굽어보고 있다. 연계정에 오르면 연못과 마을 숲, 마을뒷산까지 근경과 원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연계정 현판 좌우에는 「연계정흥폐사실(漣溪亭興廢事實)」과 「연계정중건추기(漣溪亭重建 追記)」가 있어 그 내력을 전하고 있다. 연계(漣溪)란 뜻이 잔물결이 이는 시내라는 의미이니 모현정 연못이 생기기 전에는 앞으로 냇물이 졸졸 흘렀으리라.  


미암박물관으로

    

시계를 보니 얼추 개장 시간이 다 되었다. 연계정에서 내려와 대문을 지나 뜰 앞에 서니 박물관 안에 건립된 전시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현판에 쓰인 모현관(慕賢館)은 원래의 모현관 당호를 본뜬 것이라 한다. 잔디밭 가운데로 난 포장석 길을 따라 현관으로 들어섰다.  

   

사진7. 미암박물관 전시관

 

미암 유희춘의 연표와 지도 일대기, 가계도와 가학, 학맥과 학맥도, 『미암일기』와 경연활동, 『미암집』 목판, 『미암일기』 열람대, 의암서원과 현판, 의암서원의 역사, 유희춘가의 가정경제, 송덕봉의 문학세계, 미암의 일상, 초헌 등을 관람하였다.  

   

사진8. 전시관 내부

                    

『미암일기』와 『미암집』


사진9. 『미암일기』

    

『미암일기』는 19년의 유배에서 풀려나 1567년에 홍문관 교리로 복직한 유희춘이 동년 10월 1일부터 1577년 5월 13일까지 약 11년에 걸쳐 매일같이 한문으로 기록한 개인일기이다. 『미암일기』는 모두 14책으로 작성되었는데 현재는 11책만 남아 있다. 일기 10책과 유희춘과 부인 송덕봉의 시문을 모은 부록 1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미암일기』는 임진왜란으로 인해 1592년 이전의 자료들이 불타 없어진 바람에 선조실록(宣祖實錄)을 편찬할 때, 율곡 이이의 『경연일기(經筵日記)』와 고봉 기대승의 『논사록(論思錄)』 등과 함께 중요한 참고자료로 활용되었을 만큼 사료(史料)적 가치도 높게 평가를 받고 있다.

『미암일기』는 우리에게 조선조 중기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전하는 타입캡슐이라 할 수 있다. 유희춘과 송덕봉을 위시하여 그들의 자녀와 일가친척 및 집안의 수많은 노비들이 서울과 향촌에서 살아가는 모습, 16세기 사람들의 의식주를 비롯하여 유형(有形)의 생활사만이 아니라 꿈과 사랑 같은 무형(無形)의 생활사, 등불이나 목욕, 화장실 같은 기존에 별로 주목하지 않았던 생활사 등도 기록되어 있다. 조선조 중기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미암일기』는 정치⋅경제⋅사회⋅문화⋅사상⋅어학⋅민속⋅복식⋅의술⋅기상⋅건축⋅교육 등의 분야에서 다양하고 흥미로운 정보를 제공해주는 문물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사진10. 『미암일기초』와 『다시 읽는 미암일기』

  

『미암일기』를 1938년 조선사편수회에서 정리해 『미암일기초』 5책으로 간행하였다. 2004년에 담양군에서 한글로 번역하여 『다시 읽는 미암일기』를 발간하였다. 『미암일기초』와 『다시 읽는 미암일기』는 광주광역시립무등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사진11. 『미암집』

       

  『미암집』은 『미암일기』를 기초로 미암의 9대손 유경심⋅유경인이 편집하고 노사 기정진이 교정하여 편찬되었다. 그 구성은 권수(卷首), 원집 18권, 부록 3권 합 21권 10책으로 되어 있다. 권수에는 선조의 비망기(備忘記)와 선조 10년에 내린 치제문(致祭文), 현종 10년에 내린 사제문(賜祭文)이 실려 있고, 이어 서(序)가 실려 있다. 본집의 구성은 권1~4는 저자의 시문(詩文)이고, 권5~14는 일기(日記)이며, 권15~18은 경연일기(經筵日記), 권19~21은 부록이다. 그런데 『미암일기』와 『미암집』의 일기를 비교해 보니, 『미암일기』의 극히 일부분만을 『미암집』으로 추출했다고 한다. 대체로 정치적인 것과 학문적인 내용은 많이 추출한 대신 일상생활과 풍속 등의 기사는 빠져 있는데, 이것은 선조의 행적을 일면만 부각시키기 위한 후손들의 의도가 상당 부분 반영되었다는 말이다. 자손들이 선조를 돋보이게 하려는 마음이 이해가 되지만 만일 『미암일기』 원본이 사라졌다면 그 시대의 생생한 실상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사진12. 『미암집』 목판

    

『미암집』 목판은 고종 6년(1869)에 유정식 등에 의하여 판각되었다. 1897년에 「속부록」 1권을 추가하여 중간했다. 현재 총 396판이 보존되어 있으며 『미암일기』와 함께 국가문화제 보물 260호로 지정되어 있다.

요즘에는 수많은 문헌들을 인터넷으로 검색하여 활용한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와 같은 기록유산뿐 아니라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역대 주요 인물의 종합 저술인 문집들이 속속 디지털화되어 원문에서 한글번역문까지 손쉽게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미암집』의 경우 한국고전종합DB에서 원문과 한글번역문과 목판본을 검색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http://db.itkc.or.kr/). 

『미암일기』는 아직 디지털화가 되어 있지 않다. 2013년 6월에 ‘전남대 도서관과 미암의 후손이 『미암일기』를 포함한 고문헌 24권에 대한 디지털화⋅이용서비스에 관한협약을 체결했다’라는 기사 이후로 이렇다 할 소식이 없다. 전남대 도서관에 확인해보니 초서(草書)로 된 『미암일기』 원본을 촬영하여 도서관 홈페이지에 게시할 계획이라고 한다. 사진 촬영이 완료되어 편집 중이니 내년(2020)에 서비스를 시작할 예정이란다. 연구자들에게 좋은 소식이다. 하지만 한글세대가 대부분인 상황에서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미암일기』의 한글번역문도 하루빨리 디지털 자료로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손쉽게 이용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13. 소장 고문서

         

양반의 경제생활    

 

사진14. 「분급문기」

    

「분급문기」는 재주(財主)가 살아있을 때에 토지·노비 등의 재산을 자녀들에게 나누어 준 문서를 말한다. 유희춘의 아들 유경렴이 세 자식들에게 재산을 나눠준 「분급문기」와 유희춘 손자 광선의 장인 김장이 자식들에게 재산을 나눠준 「분급문기」가 전시되어 있다. 그 꼼꼼함과 세세함이 생경하다. 양반이라 하면 흔히 경제관념이 없으며 학문에만 전념하고 재산을 축적하는 일은 멀리했다고 생각했는데.

「조선중기_양반의_경제생활과_재부관」(한국사시민강좌 29, 2009)에서 이성임은 일기기록에 근거하여 조선 중기의 양반들이 당대를 살아갔던 생활인이며 경제활동의 주체였다고 설명한다. 미암 유희춘을 비롯한 양반들은 주요 수입원인 녹봉(祿俸), 선물(膳物), 소출(所出), 신공(身貢) 등을 기록하여 관리했고 수입을 늘리기 위해 때로는 불법적인 방법까지 동원했다고 한다. 수입이 늘었을 때 좋아했고 줄었을 때 아쉬워했다고 하니 재물을 대하는 사람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다.   

  

송덕봉    

 

사진15. 『국역 덕봉집』

     

송덕봉(1521~1578)은 홍주 송씨 송준과 어머니 함안 이씨 사이에서 3남 2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자는 성중(成仲), 이름은 종개(鐘介), 호는 덕봉(德峯)이다. 송덕봉은 1536년(중종 31년) 12월, 16살의 나이에 8살 위인 유희춘과 혼인하여 부부의 연을 맺었다. 송덕봉은 “타고난 성품이 명민하고 경전과 역사서를 섭렵하여 여사(女士)의 기풍이 있다”는 평을 받았다. 1571년 3월 유희춘은 송덕봉에게 필사본 시문집인 『덕봉집(德峯集)』을 선물한다. 모두 38수가 수록된 이 시집은 시기상으로 보면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문집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시문집은 분실되어 후세에 전하지 않는다. 2012년에 조선대학교에서 『미암일기』 뒷부분에 후인의 필체로 전하는 송덕봉의 한시 25수를 기초로 『국역 덕봉집(국역 德峯集)』을 펴냈다.

박물관 대문 오른편 시비(詩碑)에 새겨진 유희춘과 송덕봉이 주고받았던 시가 생각이 났다.                          

지락음을 아내 성중에게(至樂吟示成中) 


園花爛慢不須觀  동산에 꽃 흐드러져도 보고 싶지 않고

絲竹铿鏘也等閑  음악 소리 쟁쟁 울려도 관심 없다네

好酒姸姿無興味  좋은 술 고운 자태엔 흥미가 없으니

眞腴惟在簡編間  오직 책 속에서나 참맛을 즐기려오


지락음에 차운하여(次至樂吟)


春風佳景古來觀  봄바람 좋은 경치는 예로부터 보던 것

月下彈琴亦一閑  달빛 아래서 타는 거문고도 한적하다네

酒又忘憂情浩浩  술 한 잔이면 시름 잊어 호탕해지는데

君何偏癖簡編間  당신은 어이해 책속에만 빠져있나요


미암의 시를 척척 받아넘기는 송덕봉의 솜씨가 일품이다. 역시 여사(女士)라 할 만하다. 학문을 좋아했던 유희춘과 인생을 즐기며 살기를 좋아했던 송덕봉의 밀당을 보는 것 같아 웃음이 나왔다. 

 

박물관 지킴이 

   

박물관 안에 있은 덕봉도서관(德峰圖書館)에서 노기춘 관장님으로부터 시원한 물 한잔을 얻어 마셨다. 관장님은 『미암일기』와 유희춘이 사람들에게 정확하게 알려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어떤 교수가 학생들에게 ‘유희춘이 오랜 기간 담양 대곡에 거처하며 학문을 연구하고 책들을 편찬했다’라고 전하는 잘못된 설명을 들으며 답답했다고 한다. 유희춘이 담양 대곡에 머무른 기간은 몇 년이 되지 않으며 학문 연구와 책 편찬은 주로 귀양지와 한양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초서로 된 일기를 해서로 바꾸고 다시 한글로 바꾸는 과정에서 발생한 미진한 부분들이 통용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미암일기』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번역본보다는 원문에 충실해 양질의 성과를 내기를 관장님은 희망했다. 고문서의 보존처리에 대해서 언급했는데 닥친 어려움이 있지만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관장님 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더니 겸연쩍어하며 손사래를 치며 밖으로 나가셨다. 


묘소와 신도비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담양군 대덕면 비차리에 있는 유희춘의 신도비(神道碑)와 부부의 묘소를 찾아보았다. 미암박물관에서 차로 약 10분 정도 거리인데 내비게이션만 믿고 찾았다가 한참을 헤맸다. 다행히 길가에서 밭을 매는 주민의 안내로 가까스로 찾을 수 있었다. 신도비는 유희춘 부부의 묘소로 들어가는 길 입구 언덕에 세워져 있었다. 길가에 안내 표지판이라도 설치해 놓았으면 좋으련만. 내비게이션 서비스에 기록된 주소에 오류가 있었음을 알았다. 내비게이션으로 찾을 수 있는 주소는 이 글의 말미에 적어놓았다. 

   

사진16. 미암 유희춘 신도비


유희춘의 신도비 비문은 면암 최익현(勉庵 崔益鉉) 선생이 지었다. 최익현 선생은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의 정치인이며 1905년 을사늑약에 저항한 대표적 의병장이었다. 신도비에는 유희춘의 일생, 학문과 저서, 가족 관계, 비문을 쓰게 된 내력 등이 새겨져 있다. 비문 말미의 시구(詩句)에는 유희춘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그려져 있다. 

                              

忠順夜對  충순당 야대에서

衆正失魄  바른 이들 넋을 잃었는데

獨立敢言  홀로 서서 과감히 말하였네 

賁育莫奪  맹분(孟賁)과 하육(夏育)인들 뺏을쏜가

塞垣卄載  귀양살이 이십 년에

造詣冞篤  조예가 더욱 깊었으니

大器晩成 대기만성 위해서

天意庸玉  하늘이 시련을 주심이네

穆陵籲俊  선조가 영걸을 불러들여

際遇密勿  대우가 융숭하여 기밀에 참여하였네 

   

사진17. 방무자의 묘소과 유희춘 일가 묘소


신도비를 둘러본 후 유희춘 부부의 묘소를 바라고 경사지를 올랐다. 유희춘과 송덕봉은 묘역 맨 위에 쌍분으로 나란히 묻혀있다. 그 아래 아들 유경렴 부부의 합장묘가 있다. 그리고 유희춘 봉분에서 오른편 약간 아래를 보니 첩 방무자의 무덤이 보였다. 조선조 첩의 무덤이 아직 남아 있고 그것도 선산에 함께 모셔져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문데, 종가집 할머니에 의하면 첩 방무자가 세상을 떠나면서 “내가 죽으면 영감 곁에 묻어서, 제사 지내고 남은 퇴주라도 부어줄 수 있게 해주시오”라고 간곡히 부탁했기 때문이라고 전하고 있다.   

  

맺음말  

   

『미암일기』와 미암 유희춘의 자취를 찾아 미암박물관과 주변 사적을 돌아보았다. 집에 와서 정리하려는데 부족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재차 방문하였다. 기록과 유물들을 보다 꼼꼼하게 살펴보았고 필요한 사진을 더 찍었다. 추가로 자료를 찾고 내용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정리하였다. 수백 년 역사의 숨결이 살아있는 기록과 유물에 대해 알아가는 데 드는 수고로움이 아깝지 않았다. 몰랐던 분야를 배우는 재미가 새록새록했다. 파고 또 파도 계속해서 새로운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미암박물관은 이야깃거리가 샘솟는 화수분이 아닐까! 

        

∎미암박물관 주소와 연락처     

미암박물관(眉巖博物館): 담양군 대덕면 장산리 239

전화: 061-381-1239 노기춘 관장  

  

∎미암 유희춘 신도비와 미암 유희춘 부부 묘소 위치

전남 담양군 대덕면 차동길 34-39 (비차리 7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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