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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티콘 Jul 22. 2021

슬프고도 섬뜩한 보모 루이즈의
이야기

레일라 슬리마니의 『달콤한 노래Chanson douce』를 읽고


“올해 휴가는 우리 아줌마를 꼭 데리고 갈거라고요! 인생을 좀 즐겨야 하지 않겠어요? 안 그래요?” 폴 마네의 이 말이 단초가 되어 떠난 휴가로부터 비극은 시작되었다.

시코로가 불어오는 에게해의 섬 시프노스의 푸른 바다. 뜨거운 태양 아래의 바닷속에서는 보석의 파편들이 반짝이고 휘영청 밝은 보름달 아래서는 진홍빛 부겐빌리아가 활짝 핀다. 그곳은 보모 루이즈에게 이제껏 맛본 적이 경험해본 적이 없는 달콤한 낙원이었다. 게다가 마네씨 부부와 아이처럼 하나가 된 경험을 한 그녀에게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이 꿈틀거렸다. 자신이 그들에게 속해야 하며 그들이 자신에게 속해야 하고, 부부를 오르골 속의 무용수 인형처럼 만들고 싶다는. 루이즈에게 스프노스의 바닷가는 반드시 돌아가야 할 삶의 유일한 희망이자 구원이다. 

    

“우리는 올해도 그리스에 또 갈거예요.” 루이즈가 말해준다. 매니큐어를 칠한 손끝으로 사진을 가리키며 “거기, 시프노스에!” * 

     

그녀는 시프노스에서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다. 그녀는 그리스 바다를 떠돌며 ‘조르바’처럼 자유를 만끽하는 삶을 꿈꾸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아기는 더 이상 소명召命도 목적도 아니었다. 아이는 그녀가 욕망하는 곳에 다다르기 위한 수단이자 열쇠일 뿐이었다. 빚과 원룸 주인의 압박이 점점 그녀의 숨통을 조여 오는데 마네씨의 아이들은 커가며 그녀의 손길이 필요하지 않을 날이 다가온다. 그녀에게 다른 아기를 돌보는 일자리 제의가 들어오지만 그녀는 단칼에 거절한다. 그녀의 유일한 관심은 그녀를 에게해의 파라다이스로 데려갈 마네씨의 새 아기일 뿐이다. 그녀는 그녀가 가진 마지막 돈을 털어가며 마네씨 부부에게 새로운 아기가 생기기를 기도하지만 물거품이 된다. 공황 상태에 빠진 그녀의 생각은 단순하다. 지금의 아이들이 죽는다면 마네씨 부부는 다시 아기를 가질 것이다.

     

『달콤한 노래』는 프랑스의 여성 작가 레일라 슬리마니의 소설이다. 이 작품으로 2016년에 슬리마니는 ‘그 해 최고의 그리고 가장 상상력이 풍부한 산문 작품’의 작가에게 수여되는 콩쿠르 상을 받는다. 이 작품의 원제는 ‘CHANSON DOUCE’이다. 우리말로 바꾸면 ‘감미로운 노래’로 프랑스의 자장가를 이르는 말이다. 우리나라에 ‘자장자장 우리아가’로 시작하는 자장가가 있다면 프랑스에는 다음과 같이 시작하는 자장가가 있다.                         

Une chanson douce que mechantait ma maman

엄마가 불러주던 달콤한 노래

En suçant mon puce j’écoutais en m’endormant

엄지손가락을 빨며, 그 노래를 듣다 잠들곤 했지.

Cette chanson douce je veux la chanter pour toi

이 달콤한 노래를 너를 위해 불러주고 싶어. 

Car ta peau est douce comme la mousse des bois 

너의 피부는 숲속의 이끼만큼이나 부드러우니까


엄지손가락을 빨며 엄마 품에서 잠들 아이를 위해 불러 줄 자장가를 슬리마니는 끔찍한 유아 살인을 다룬 소설의 제목으로 사용하였다니 아이러니하다. 

   

레일라 슬리마니의 소설들에서 고전이나 그에 버금가는 작품들의 자취를 느낄 수 있었다.

슬리마니는 2014년 첫 번째 소설인 『그녀, 아델(Dans Le Jardin De L'ogre)』을 발표한다. 『그녀, 아델』에서 작가는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서두에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한 단락을 길게 소개한다. 그것이 실마리가 되었는지 『그녀, 아델』에서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그림자가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바람둥이로 나오는 토마시와 일생에 딱 한 번 외도를 하는 테레자가 『그녀, 아델』에서는 성적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는 아델과 일생에 딱 한 번 친구 딸과 외도를 하는 리처드로 바꿔 등장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콤한 노래』에서는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표도르 도스토예프스끼의 『죄와 벌』와 연관되었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이 눈에 띄었다. ‘아기가 죽었다’로 시작하는 첫 문장은 『이방인』의 ‘오늘 엄마가 죽었다’를 떠올리게 한다. 뫼르소가 지중해 연안, 알제 해안의 뜨거운 햇빛 때문에 살인을 저질렀다면 루이즈가 저지른 살인의 씨앗이 지중해 해안, 시프노스의 따가운 햇빛을 받으며 잉태되었다고 할 수 있다. 루이즈가 살인을 저지르기 전 마네씨 부부에게 새 아이가 생기기를 바라며 아당과 밀라를 데리고 돌아다니는 곳은 노란색 불이 보도를 밝히는 파리의 지저분한 뒷골목이다. 『죄와 벌』에서 전당포 노파 자매를 살해하는 라스꼴리코프를 둘러싸고 있는 색은 노란색이다. 그리고 라스꼴리니꼬프가 배회하던 불결한 뻬쩨르부르그의 뒷골목은 파리의 그것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마의 시골집에서 돌아오던 마네씨 가족은 파리 시내를 떠돌던 루이즈를 발견한다. ‘어떤 경계의 끝에서 이제 막 그 경계를 넘으려 하는 루이즈.’라고 묘사한 작가의 말이 라스꼴리니꼬프가 경계를 넘어 살인에 이르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슬리마니가 앞선 작가들의 영향을 받아 작품에 투영했지만 슬리마니만의 스토리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작품들을 읽으면서 그런 표시들을 발견하긴 했지만 책을 덮으면서 슬리마니의 이야기에 푹 빠져있는 나의 모습을 발견했다. 

    

‘선한 의도가 꼭 선한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루이즈는 두 번의 휴가를 경험한다. 한 번은 루비에 가족과 또 한 번은 마네씨 가족과. 루비에 부부나 마네씨 부부나 그녀를 휴가에 데려간 것은 그녀가 아이를 돌보는 일뿐 아니라 그녀의 수발이 필요해서였다. 하지만 휴가지에서 그녀를 대하는 두 부부의 태도는 완전히 달랐다. 루비에 부부는 그녀가 자신들의 필요로 왔음을 명확히 했고 스테파티가 아이들과 함께 놀려고 하면 제제를 가했다. 마네씨 부부는 시프노스에서 그녀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었고 그녀를 격의 없이 한 가족처럼 대했다. 그런데 루비에 부부의 아이들은 그녀의 돌봄 후에 성장해서 청소년이 되었고 마네씨 부부의 아이들은 싸늘한 주검이 되었다. 그 이유가 루비에 부부의 아이들을 돌보던 루이즈와 마네씨 부부의 아이들을 돌보던 루이즈는 서로 다른 루이즈였기 때문일까? 이 소설을 읽고 있자니 ‘인생이란 참 알 수 없다’라는 생각이 든다.     


* 『달콤한 노래』, 레일라 슬리마니 지음, 방미경 옮김, 북이십일 아르테, 2017, 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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