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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래로 Jun 20. 2019

박수받는 강제, 그런 무대 위의 억압

게일 루빈의 <일탈>을 읽고

섹스는 장려된다. 출산이 장려되듯, 소비가 장려되듯, 섹스는 장려된다. 쾌락과 돈의 쾌락으로 섹스는 소비된다. 마치 공기처럼, 물처럼, 인간 생존에 결부시켜—질식사의 위험과 좋은 공기에 대한 갈망으로, 혹은 탈수증의 위험과 갈증과 같은 생존 욕구로—섹스는 얘기되고 있다. 과연 그러한가? 성욕이란 과연 인간의 근본적 욕구인가? 나는 이것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 근본에, 목숨이 걸려있는 바로 그러한 근본성에 있어 섹스는 자연스럽게 생존의 조건에서 소거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성욕은 다만 장려될 뿐이다. 좋은 공기 좋은 물을 위한 환경운동, 마스크끼고 다니기, 깨끗한 물 많이 마시기 운동이, 그 욕구와는 전혀 상관없이 장려될 수 있는 바로 그러한 점에서 말이다.  

경영학의 대가인 피터 드러커는(1909-2005) “측정되지 않는 것은 관리되지 않는다”라는 말을 했다. 이 경영학의 금과옥조를 보며 푸코의 생정치(bio-politics)를 떠올리는 것은 무리가 아닐 것이다. 이 두 가지 개념은 그만큼 밀접한 관련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 특히 한국사회에서 우리는 사람을 대신해 쓰이는 말로 인적자원(human resources)이란 말을 흔히 듣곤 한다. 그렇다, 물건만이 관리의 대상이 되는 시대는 이미 저만치 뒤에 있다. 관리되는 것은 인구 그 자체이다. 인간은 자원이 된다. 이 같은 인구 관리 정치의 수사로써 출산력(fertility)과 출산율(birth rate)은 경영자인 국가가 노동자인 국민에게 외치는 독려 구호가 되어 사방에 메아리친다.


 “최고 권력을 상징하던 죽음의 오랜 지배력은 이제 육체의 경영과 생명의 타산적 관리로 은밀하게 옮겨간다. 다양한 규율, 가령 초등학교, 중등학교, 병영, 일터가 고전주의 시대에 급속하게 퍼져 나가고, 또한 정치 행위와 경제 활동의 영역에서 출생률, 수명, 공중보건, 주거, 이주의 문제가 대두하며, 따라서 육체의 제압과 인구의 통제를 획득하기 위한 다수의 다양한 기술이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이 현상들을 통해 ‘생체-권력’의 시대가 열린다.” [성의 역사 1, pp.159]

성애는 장려된다. 하나는 법의 울타리 안에서 갖은 노력으로 양육되고 체계적으로 관리되며, 다른 한쪽에서는 방목하듯 퍼트렸다가 다시 잡아들인다. 이 과정에서 물 샐 듯 없는 감시가 이루어지고, 또 훈계하고 통제한다. 어쨌든 이 모두 훈육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결국, 일종의 인증마크처럼 성공적인 정상성이 몸에 찍혀 당연시되거나, 비정상으로 낙인찍혀 박해받는 것이다.

따라서, 오직 이성애만이 장려된다는 말은 이러한 일관성에 위배된다. 이성애가 장려된다는 것에서 이성애가 특권화 되어 있다는 결론을 도출하기에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는 것이다. 특권은 언제나 말이 없는 것이고, 그 스스로의 귀족적인 성격에 걸맞게 예(禮)에 어긋나는 일이 없다. 환호를 받는 일도 없고, 과공(過恭)에 부끄러워하는 일도 없다. 특권은 그러한 것이다. 성애는 장려되고, 그렇게 모두 한 마디씩 떠들고 또 들어야 하는 야단법석 속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 자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이의 특권을 바라보아야 한다. 즉, 어떠한 격려나 호응 없이 그곳을 지나치게 만드는 그러한 자연스러움야말로 특권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것이다.

성애와 젠더의 구분은, 따라서, 필요하다. 구분되지 않는 이 두 범주의 의도적 오독을 통해, 단지 욕망을 억압할 뿐이라고 하는 정상성과 비정상성 사이에 기만적이고 차별적인 위계가 생겨나게 된다. 욕망이 억압되는 방식은, 부르주아지적 시민성과 동일어로 쓰이고 있는 올바른 심리적 상태를 지닌 ‘지성인’을 길러내는 방법으로 전유(專有)되는데, 정상성이란 바로 이를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여성은 오직 여성이란 이유로 억압받는다는 것—출생시의 성별이, 역사에 퇴적되어있는 이제까지의 같은 성sex을 부여받은 사람들의 고통을 공유해야 한다는 당위로 이어지는 것과 같이—에는 여성의 억압과 여성성의 억압, 여성의 활동에 대한 억압이 뒤섞여 있다. 따라서, 젠더적 위계에 따라 성애 또한 그러하다고 믿는 것은, 여성의 성적 활동 또한 자동적으로 억압받는다는 잘못된 결론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성애는 단지 장려될 뿐이다.

 이전 시대와의 많은 형태적 연관성에도 불구하고, 근대적 성 배치는 기존 체계와 구별되는 뚜렷한 특징을 지닌다. 유럽과 미국의 산업화 및 도시화로 인해 전통적인 시골과 농촌의 인구는 새로운 도시산업과 서비스 부문의 노동력으로 재구성되었다. 그들은 새로운 형태의 국가기구를 탄생시켰고, 가족 관계를 재편시켰고, 젠더 역할을 변화시켰고, 새로운 형태의 정체성을 가능하게 만들었으며, 다양한 사회적 불평등을 새로이 산출시켰고, 정치와 이데올로기로 인한 갈등의 새로운 판형을 짜게 했다. 이들은 또한 성적 개인, 인구집단, 계층화, 정치투쟁이라는 뚜렷이 다른 유형들로 특성화된 새로운 성 체계sexual system를 양산했다. [게일 루빈, <일탈>, 5장 성을 사유하기, pp.312]

 가장 심각한 성적 체계의 재현은 불행한 희생자들이 그저 한 무리의 소 떼가 되는 카프카적 악몽이다. 그 희생자들을 확인하고 감시하고 체포하고 처치하고 투옥하고 처벌하는 과정에서 성범죄 전담 경찰, 교도관, 정신의학자, 사회복지사 같은 수많은 직업이 창출되고 그들의 자기만족이 양산된다. [게일 루빈, <일탈>, 5장 성을 사유하기, pp.326]

 이성애자, 즉 섹스를 황홀한 것, 미지의 것, 그렇게 인간성의 가장자리로 인도하는 일종의 주술적 힘과 같이 신비화하는 이들이 믿는 것과 마찬가지로, 또한 마찬가지의 마력이 이성애 외의 성애에도 깃들어져 있을 것이라 믿는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추론, 혹은 강한 확신은 어쩌면 권력에 의해 유도된 것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사실 성애는 누구에게나 장려되고 그 형식은 일관성 있게 적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권력의 확장, 증대, 상승에의 동력이 됨으로 그 신성성(神聖性)과 상반되는 성애가 해석되는 방식은 권력의 시선에 바라볼 때 정확히 지켜지는 문법과 그에 걸맞게 세련된 언어 사용과 같은 것이다.  

나는 이제 젠더적 위계와 더불어 변주하는 성애의 다양성을, 또한 그러한 다양성이 다시 젠더적 위계의 틀에 맞춰 위계 지어지는 방식을 해체하기 위하여, 매체와 그 내용의 구분을 해체해 매체 자체가 메시지라고 했던 맥루한의 논의를 끌어 들어와 발전시키고자 한다.

“매체는 환경을 바꿈으로써 우리의 지각 작용의 독특한 비율을 야기시킨다 어떤 감각기관의 확장이든지 그 확장은 우리가 사고하고 행동하는 방식 그리고 지각하는 방식을 변화시킨다. 이러한 비율이 변화하면 사람도 변화되기 마련이다.” [ 마셜 맥루한, <The Medium is The Massage>, New York: Bantam Books, 1967, pp.41]

 
어떤 매체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좀 더 특정해서, 인터넷 블로그나 신문사, 혹은 인스타그램, 유튜브를 떠올려보자. 나는 이렇듯 특정을 했지만, 이 매체들 간의 고유한 특징, 즉 공통점을 기반으로 한 거대한 차이점으로 인해 위의 매체에 대한 일반적인 인상을 우리가 공유할 수 있다고 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우리가 머릿속에 떠올린 매체는,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저마다 그것에 고유한 ‘분위기’가 있을 것이다. 마셜 맥루한이 말하기를, 이러한 분위기 자체가 바로 그것이 전하는 ‘메시지’가 된다. 따라서, 그가 “매체가 메시지이다”라고 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매체 자체를, 어떤 중립적인 기구가 아닌—이를테면 속-빈-관이 아닌 수도관이나 망원경으로써—그 자체로의 메시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인스타 자체가 메시지라고 하는 주장은, ‘어떤 힘’이 인스타를 이용하고 활용하기를 장려한다는 것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그렇다.  인스타가 지닌 내부의 규율은—시선의 쏠림과 관심에 대한 관심은 좋아요라는 보상기제 등을 통해—하나 된 이미지를, 균일하고 일관성 있는, 즉 인스타-스러움을 창출해낸다. 이 인스타-스러움 야말로 소비하거나 과시하는, 혹은 소비적 자아에 대한 동정을 구하거나 소비하는 자아에 대한 숭배를 바라는 자본주의-정신 그 자체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개인의 신체라는 매체로써 몸의 역사는 로크로부터 시작한다.  그 이전까지의 역사를 폭력적으로 재단해보면, 몸이란 곧 신의 몸이나 왕의 몸의 연장extention, tool이었을 따름이다. 신하란 왕의 손, 왕의 눈이고 신민이란 왕의 발 혹은 발톱의 때와 같은 존재인 것이다. 물론 이와 반대로 민중을 자신의 몸이라 생각하는 소위 ‘선군’ 또한 있었겠지만, 큰 틀에서 동일한 논리가 적용된다. 모든 것은 왕에게 소유된 것으로, 왕은 신의 재현으로서 이 권리를 행사했다.  로크가 말한 자기소유권과 그로부터 창출된 재산소유권이란 자본주의가 상정하고 있는 시장경제적인 개인이 지닌 바로 그 권리와 같다. 그 자신이 상품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 수 있을 만큼이나 그 자신이 상품이 되어 시장에서 팔릴 것을 기대하는 것은 이 권리에 내재된 논리의 당연한 도출이다.

여성의 신체 기관을 잘라내고(할례), 왜곡하고 압박하고 (전족), 도려내거나 하는 등의 모든 성적 억압은, 신체를 일종의 매체라고 보았을 때 검열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성애가 장려된다고 주장한 바, 매체의 이용은 장려되나 그 내용적 측면은 이미 매체에 의해서 구조 지어진, 즉 매체는 스스로 그것의 메시지를 산출해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성애는 장려되며 그 내용상에 있어 철저하게 계획적인, 그렇게 구조적인 억압이 이런 장려 하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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