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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래로 Jun 23. 2019

기게스의 반지

플라톤의 <국가>를 읽고

일차적 해석


글라우콘은 도덕이란 단지 사회구조 내에서 형성된, 인간 욕망의 효과적 제한 수단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도덕이 ‘올바른’ 것으로 치부되는 이유가 도덕성에 깃든 선함 혹은 정의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한 사람이 도덕적으로 살게 될 때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명성—선하다 또는 정의롭다는 관념 등의 효과—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사회가 도덕을 장려하는 이유가 되기도 하는데, 사회구조가 부여한 특정한 ‘가치’가 도덕에 부가적으로 따라오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도덕적으로 살지 않을 것이라는 뜻(걱정)을 내포하고 있다. 이는 ‘정의는 단지 강자의 이익(편익)’이라는 트라시마코스의 주장과 결부해 생각해볼 수도 있다. 여기서 트라시마코스가 말한 강자란 바로 사회구조를 형성하는 권력자일 것이다. 혹은 사회계약론의 언명으로는, 최초 상태에서의 계약이 될 것이다. 그다음으로, 강자의 편에 서서 얻는 이익(과 그 부수적 효과) 그리고 최초의 사회계약 상황에서의 조건에 따라 도덕관념이 형성될 것이다. 즉, 글라우콘의 정의에 따르자면 도덕관념에는, 도덕이 그 자체로 ‘옳은(정의로운) 것’이라 따라야 한다는 당위보다는, 도덕에 부여된 이차적 가치를 추구한 결과로써 따르면 좋다는 단순 인상이 형성되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전자의 강자의 이익으로써 정의와 그 정의에 따르는 것이 도덕으로 불린다는 주장은 2500년이 지난 지금 현실에서도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후자의 사회계약에 따라 형성된 도덕관념이란, 앞서 언급한 도덕을 따를 때 얻게 되는 부차적 이득과는 정반대로 지키지 않았을 때의 불이익관 관련되어 있다. 즉, 사회계약 이전의 무정부 상태에서 일어날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플라톤으로 하여금 올바름이 그 자체로 ‘옳은 것’으로 논증되길 바라는 글라우콘의 입장은 이제까지의 정의-도덕관념에서는 불가능했던 정의의 그 자체로써 가치-입증이다. 글라우콘은 이를 위해, 기게스의 반지 전설을 말한다. 인용된 기게스의 반지 전설은 일종의 사고 실험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전설을 통해 글라우콘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자신의 행동과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있는 상황(투명인간이 될 때)에서는 그 누구든 부정의한 행동을 저지르게 되고 만다는 것이다. 이는 정의로운 자와 부정의한 자를 나누는 기준은 단지 ‘보여지는 것’에 따른 것이며, 이 시선을 제거하면 두 부류는 하나가 될 것임을 예상하는 것이다.


-유한책임회사(Limited Liability Company)와 주식회사(corporation)의 예


 제국주의와 초기 자본주의 태동기에 결정적이었던 것은 신대륙 탐험 전후반을 걸쳐 일어난 동인도회사들의 설립이다. 이러한 회사들은 말만 회사였지, 국가와 결합한 제국의 선봉들로, 식민지를 찾아 식민-자본주의를 세계로 확장시킨 주역들이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국가와 금융자본주의의 결합과 그 확장에는 새로운 형태의 회사의 설립이 있다. 그것이 주식회사이다. 합명회사나 합자회사에서의 무한책임사원과는 달리(일인기업(개인사업) 또한 무한책임이다), 유한책임을 가진 유한책임회사와 주식회사의 주주는 자기 몫 이상의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 오늘날 거대기업들은 대부분 주식회사인데, 이는 자본 집중이 용이하고, 회사 채무가 개인에게 전가되지 않는 점 등을 장점으로 하여 기업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형태를 지녔기 때문이다. 문제는 기업들이 기업의 몸집을 불리는 와중 유한책임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 환경재앙을 비롯한 지금의 전 지구적 문제를 일으켰다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과 이를 책임지게 만들 그 어떤 법적 책임 또한 없다는 슬픈 사실이다. 이는 법이 죄형법정주의와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내가 위의 유한책임을 언급한 것은, 기게스의 반지가 착용자로 하여금 투명 상태가 되게 하여 그의 행위의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과 같이, 유한책임이라는 개념이 그러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해마다 되풀이되는 유조선 침몰과 같은 사건은 약과이다. 화석연료의 사용, 전 지구적 영향을 미쳤던 프레온 가스의 사용, 맥도널드 등의 회사에서 자행한 열대우림 개간 및 환경파괴,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사용될 그 대안이 없는 플라스틱의 사용 등을 보았을 때, 지금도 그 결과가 눈앞에 드러나 있지 않아 책임도 없을 것이라는 믿음이 팽배하다. 사실, 그 영향이 전 지구적 영향으로 나타난 지금 이 시점에도(대규묘 멸종과 지구온난화 등)이 행위의 주체인 기업들을 막을 수 없다. 국가마저 기업에 종속된 이 시점에 기게스의 반지는 기업의 자연화와 당연함—즉, 비가시화—를 불러왔다는 점에서 당연히 존재하는 것이다. 그 누가 기업의 책임을 말하는가? 기업은 책임에서 투명하다.


이차적 해석


1) 헤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헤겔은 노동하지 않는 주인은 오히려 노예에게 모든 것을 의존하고 있다고 말한다. 주인은 오로지 노예의 노동을 향유할 뿐인데, 이로써 주인은 자연과의 관계를 포기하게 된다. 또한, 주인은 노예 없이 정의될 수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기게스의 반지 전설을 이에 따라 해석한다면, 목동 기게스가 ‘우연히’ 반지를 발견하는 것은 노동하는 과정 속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방금 발견해낸 것의 사용법을 스스로 알아낸다. 발견과 더불어 사용법까지 깨우친 노동자 기게스는, 자신의 노동을 ‘보고’하러 왕에게 간다. 왕은 기게스가 노동하는 과정에서 무엇을 얻었는지 혹은 무엇을 깨닫았는지를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다. 즉, 대비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왕은 속수무책으로 기게스에게 당하고 만다. 주인과 노예의 관계에 역전이 일어나고 만 것이다.


2) 레닌: 주인 살해, 노동자 계급 혁명
왕이 살해되고 왕국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점이 『국가』 에서는 비판의 대상이 된다. 이를 확장해보자면, 노예-계급이 혁명을 통해 주인-계급이 되는 상황을 떠올릴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노동자 계급이 스스로 주인-계급이 되는 세상에서, 또다시 노예-계급이 생겨나지 않기 위해서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는 것이다. 첫 번째는 모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주인을 죽이는 것이다. 물론 해석자에 따라 다르겠지만, 혁명을 모든 주인을 죽이는 쪽으로 해석한다면, 플라톤의 기게스의 반지 전설에 비판을 이런 혁명에도 적용시킬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혁명은 실패했고, 이는 혁명을 이용해 권력유지 및 사익을 취한—즉, 반지의 절대적 힘에 종속된 (스탈린과 같은) 인간 때문이라는 해석 쪽으로 말이다.

  
3) 니체: 초인
『도덕의 계보학』 에서 니체는 선악 개념이 역사적(계보학적)으로 변화함을 밝힌다. 새로운 힘(기술) 즉, 계보학적으로 전 시대와의 단절을 가져올 새로운 가치가 나타난다면(기게스의 반지), 도리어 쓰지 않고 기존 체제에 순응하는 것이야 말로  그에겐 비난의 대상이 된다. 만약, 힘에의 의지를 추구해 기존 구조를 초월한 인간이 등장한다면(기게스), 그에겐 기존 질서, 도덕관념 등은 아무런 효용이 없을 것이다. 기게스가 그렇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는 무엇보다 ‘반지에 깃든 힘’을 사용하고자 선택했다. 여기서 니체는, 플라톤이 반지에 종속되지 말고, 기존 체제에 순응하며 행복하라는 단언을 힘에의 의지를 축소시키는 노예 도덕이라고 비난을 퍼부었을 것이라고, 반대로 기게스를 힘에의 의지를 추구한 초인으로 해석했을 것이라고 예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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