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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래로 Jul 09. 2020

사장님들의 왕국

한국의 재봉건화


사장님이란


호칭은


별다른


대안이


없는


존칭어로


쓰인다.

 

한국사회에서 고유한 이름으로 불린다는 것은 기업인, 국회의원, 교수, 연예인과 같은 소수의 직업군에 부여된 특권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재계와 정계, 학계, 연예계 등의 계열은 다른 모든 계열에는 없다고 여겨지는 사회조종의 능력으로 인해 이러한 특권을 부여받는다. 마치 선장의 이름 아래 선원들이 모이듯, 계들을 묶는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러한 능력의 존재 여부이다. 그러나 능력과 관심의 상관관계에 대해 널리 알려진 관념은 오도된 것이다. 이 양자는 인과관계로 묶이지 않았으며, 하나의 고유한 현상의 다른 두면이라 해야할 것이다. 그 현상은 노동의 일반성에 대한 반테제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 위의 계열들은 모두 노동으로부터 발원하지만 노동에 대한 노동의 반테제로서 이 현상 안에 포괄된다. 무기명의 화폐, 비밀선거, 지식의 공공성, 그리고 대중의 익명성에서 발원하는 이러한 권력은 구조에서 기인하는 권력이다. 즉, 사회구조는 대다수의 무력한 개별인간들의 관리를 그 기능으로 하는 권력구조이다. 구조화된 것은 자칫 그 구조의 변혁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비판적 사회조종의 능력을 요구하지 않기에, 위의 상관관계는 거부된다. 오히려 각기의 영역들은 자본에 편입되어 있다. 자본에 의한 노동착취뿐 아니라, 왜곡된 대의제도에서 발생하는 정치적 무력감, 폐쇄적 학문체계가 불러일으키는 학문에 대한 외경심과 무관심, 공인으로서 최선을 다해 사회적 관심거리가 되어야만 하는 연예인에 대한 걱정 등은 이를 불러일으키는 능력에 의해 우리의 일상이 된다. 바로 이와 같은 능력이 기권력구조에 최우선적으로 요구되는 능력이다. 따라서, 알려진 사회조종의 능력이란 그 근원에 대해 행해지는 기만능력이다.


자본화된 것은 이것의 지상명령인 이윤의 극대화에 따라 운동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소외와 착취를 발생시킨다. 이러한 성질은 각 영역의 세부항목들에게 이것이 경제성이 있다는 말로 표현되곤 한다. 이러한 경제성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 영역은 오히려 예외적이며, 이 원칙이 우리의 정체성마저도 규정한다. 다양한 직업군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호칭이 등장하는 일반적 노동환경에서 김씨, 이씨와 같은 호칭을, 넓게는 박대리에서부터 좁게는 최작가님을 포괄하는 가장 큰 범주로 보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 이유는, 호칭이 대체가능한 자원임을 나타내는 표지로서 부속품의 종류를 나타내는 분류기호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호칭의 자리는 탈락된 이름의 자리이다. 언제나 대체가능한 것을 필요로 하는 사회에서 이름의 탈락은 사회적 요구에 부합한다. 탈락된 이름의 자리, 그 빈 공간에 꼭 들어맞는 부품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찾아내는 것과 재빠르게 끼워맞추는 것이 이러한 요구에 해당되며, 호칭은 이에 따라 규격화된다. 또한, 규격화된 것은 탈락된 이름과 함께 그의 탈락 자체를 표시해주는 기능을 한다. 탈락 자체를 표상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사회적 압력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탈락된 자들을 바라보는 대다수의 개별 인간들에게 어느 누구나 탈락될 수 있다는 사실은 대체가능성의 긍정적인 면을 강제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즉, 어느 조직에서나 그 대체가능한 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그들의 적응력은 사회적 미덕으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탈락은 사회적 규격이 된다. 그리고 바로 이 탈락의 자리에 꼭 들어맞는 것으로서 성공 또한 사회적 규격이 된다. 탈락의 규격들이 쓰여있는 설명서가 언제나 권장하고 있는 용례인 것이다. 


사회 곳곳에 층층이 놓여진 것은 규격화된 실패와 그에 꼭 들어맞는 규격화된 성공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규격 외의 것들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 이들이 사장님들이다. 이 호칭은 성공을 내재화하고 있지만, 탈락된 자들과 마찬가지로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 호칭일 뿐이다. 이 예외들은 탈락을 구성하는 바깥이다. 이들은 패자부활전을 통해 결승 진출을 꿈꾸는 이미 한 번 실패했거나 앞으로 실패할 운명이 예정된, 성공과 함께 실패마저 내재화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스스로 부품 이상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 기꺼이 부품들에 대한 대조를 떠맡는 프로토타입 역할을 한다. 부품을 넘어선다는 것은 곧 대체불가능성을 말한다. 바로 이것이 사장님들의 염원이다. 따라서 사장님은 대안이 없는 호칭이다. 사장님으로 불린다는 것은 노동자들의 대체불가능한 꿈이기 때문이다. 사장님들의 왕국은 이러한 의미에서 노동자들의 꿈의 왕국이 된다. 하지만 여기에 놓여있는 것은 이중적으로 꼬여있는 기만이다.


끝내 불리지 않는 것은 그 자신들의 이름인 바, 기만은 전자의 꿈이 곧 꿈꿀 능력을 상실한 이들의 꿈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꿈은 현실에 맞닿아 있다. 그리고 꿈은 오직 현실적 꿈일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즉 후자에게 닥친 현실적 상황이라는 제약 때문에 꿈은 결코 꿈이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현실적인 꿈은 그저 장려되기에 그치지 않는다. 현실적인 꿈은 강조되고, 교육되고, 주입되며 그 최종단계에 이르서는 스스로 깨쳐지는 종류의 현실이다. 현실적인 꿈은 현실이 깨어쳐주는 망상, 그 망상으로부터의 기상이다. 근대적 교육은 근로자를 길러내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다. 예로부터 훈육은 육체적 노동력과 노동생산성의 극대화를 목표에 두며, 훈육된 자에겐 저마다 신체에 가해진 각인이 남는다. 각인된 것은 이를테면 사회과목에 있어서는 시민사회적 덕성이라 불리는 재화에 관한 감수성, 경제과목에 있어서는 끝없는 효율성 추구에 대한 압박감이다. 규격화된 평가보고서와 평가의 대상으로서 개개인의 능력은 십이 년 정규교육과정의 최종목착지로서 인생을 결정하는 시험에서 수렴한다. 규격화된 개인의 능력의 평가보고서, 규격화된 능력의 평가보고서로 작성된 개인은 그렇게 부품처럼 지침에 따라 알맞은 곳으로 수급된다. 인생의 향방을 결정짓는다고 알려진 중요한 분기점에서 각자가 내리는 결정들은, 이름하여 권장되는 ‘코스들’은, 미리 결정되어 있는 전체 구조에서 내려진 정황적 결정들의 연속이다. 뒤돌아 본 길의 경로는 길들의 경로가 종합된 다이어그램 체계 내에 포섭되며, 예/아니오 코드부호에 따라 설정된 경로와의 놀랄만한 유사성은 이 다이어그램이 지닌 능력을 방증한다. 이러한 정황성에서 각각의 결정이 지닌 결기는 한없는 의미 퇴색을 경험한다. 미리 결정되어 있는 곳으로서 사회는 벽으로 둘러쳐진 중세의 장원을 떠올리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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