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삿날 절을 하면서
연예인과 정치인의 자녀는 쉽게 친구가 될 수 있다.
그들은 가면무도회에서 만나 그 가면을 벗는 것으로 모종의 동질성을, 곧 우정을 느끼게 된다. 가면을 벗게 되기까지의 차례는 한국 서민의 차례 지내기와 유사하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데, 이는 차례에 참여한 이들이 맺는 관계의 양식에서 비롯한다. 조상님을 기리는 것에 있어 근대인의 가면이 놓이게 되는 곳이 반질반질하게 문질러진 방바닥이라는 점에서 이들이 맺는 관계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나와 아버지, 아버지와 큰아버지는 서로의 움직임으로 생긴 작은 너울에서조차 상대방의 무게를 느낄 수 있는 침대 위의 연인처럼 바로 그렇게 방바닥을 타고 흐르는 묘한 기류를 느낄 수 있다. 절을 한다는 것은 내려놓는 것이다. 이들이 행한 잠시 동안 내려놓기는 유구한 전통인 항구적으로 집어 들기와 관계한다. 곧추 올라서는 순간 뒤따라오는 정적은 부끄럽게 노출된 어느 근대의 단면이다. 나는 이러한 이유에서인지 언제나 서둘러 일어선다. 그리고 후회한다. 항구적으로 집어 올리는 것이 감추고자 하는 바 내려놓음이 곧 배변에 깃든 쾌락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기 때문이며, 동시에 언제나 집어 올리지 못한 여분의 존재는 우리로 하여금 다다를 수 없는 근대를 깨닫게 해 주기 때문이다. 남겨진 여분의 존재는, 나와 아버지, 아버지와 큰아버지가 내려놓은 것 그 사이에 놓인 가면, 곧 도저히 집어 올릴 수 없는 종류의 구분이다. 차례는 그 마지막에 이르러 그렇게 놓아진 가면을 다시 집어 올리게 하지만, 집어 올린 것과 내려놓은 것 사이에는 언제나 불균등한 ‘하나 더’의 순환이 존재한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친구가 되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이와 유사하나 완전히 다른 친구 되기는 그 이후에 차차 진행될 탈피하는 과정, 곧 모조리 벗어던진 나체를 서로의 몸에 가로 두게 되는 사태에 이르기까지 중단 없이 지속된다. 이들에게는 그러한 과정을 막아서는 위와 같은 종류의 가면은 부재한다. 집어 올리지 못한 그러한 하나 더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부재의 증거는, 가면 벗은 맨 얼굴을 드러내는 것이 그 나름의 쾌락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가 아닌, 서로의 나체가 날인한 계약이 불러일으키는 신뢰가 쾌락의 경제성을 이루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한 번에 내려놓고, 다음 순간에 한 번에 집어 올린다. 단면으로서 노출되어야 할 부끄러움이란 그 공간을 찾지 못한다. 순환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닌 근대인의 친구가 되는 과정으로서 근대인이 되는 과정 자체이다. 계약 위반 시 지불되어야 할 담보가 되는 것은 충분히 구체적인 것이다. 여기서 집어 들지 못할 것에 가치가 부여되지 않는다. 이름하여 실물경제로서, 자체의 구체성에서 기인하는 가면의 값어치와 그 구체성 아래 놓인 내밀함에 근거를 둔 쾌락의 경제가 확인된다. 내맡길 곳 없는 가면을 내려놓지 못한 채 한 손에 집어 들고 늘 엉거주춤한 자세로 남성과의 관계에 임하는 어린 남성은 부자유하다. 부자유한 그는 어리숙하다. 당장 내려놓으라. 이에 대한 충고는 그 부자유에 상응하여 잠시 내려놓기에서 자유로움을 경험한 어른 남성에서 날아오는 일갈이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전통에서 탈락한다. 그러나 친구사이에는 경제성을 상실한 충고는 부조리로 통용된다. 중요한 것은 구체성, 계약상의 치밀함, 절실히 요구되는 곳에서의 무한한 침묵, 고통조차 질식할 곳에서 이루어지는 친구 사이의 연민의 감정이다. 그렇다, 이들은 친구인 것이다. 친구. 이러한 이유로, 나는 근대에서 좌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