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발견할 수 없었나
나는 핵폭발 이후의 분진 속에서 이 글을 쓴다.
I.
인물에 집중해보도록 하자. 마치 우리가 역사 시간에 그래 왔던 것처럼. 당대의 경제와 문화, 사회・환경적 요인은 마지막 챕터로 미뤄둔 채, 그의 악마 같은 동기에 방점을 찍어보도록 하자. 그는 군림하는 폭군이다. 그리고 그 점을 악마의 잔당들로 이어 그어 동기 일반을 추론해보도록 하자. 일그러진 욕망과 뒤틀린 심성, 약한 것에 대한 혐오와 그것의 근거가 되는 자기연민, 강한 것에 대한 동경, 강자에의 감정이입 혹은 무한한 자기긍정, 그 어떤 것이든 좋다. 그 무엇으로 불려도 좋다. 우리 이 사람을 똑바로 마주해보도록 하자. 맞다, 나도 보인다. 나도 그의 사악함을 확인할 수 있다. 되풀이하여 나도 그에게서 똑같이 인간 이하를 보고 있는 중이다. 그는 그의 악함에 대해 벌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누구에게서? 나와 여러분들에 의해서 그는 기록될 것이고, 그는 기억될 것이다. 그는 고통받아야 할 것이다. 그는 고통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무엇으로부터? 고통받는 우리에 의해서? 우리가 아니면 도대체 누구로부터? 우리가 고통받는 이유는 우리의 고통 그 자체로부터 마치 운명처럼 다가온다.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이 운명임을. 그러나 그의 고통은 누구로부터? 그의 고통은 누구의 고통으로부터? 그의 고통이 그의 운명이 아니라는 점에서, 바로 여기서 이유인 것이 더 이상 이유가 되지 못한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그의 생으로부터 지나간 고통, 정확하게 말하면 내 것이 아닌 그렇다고 그의 것이 아닌 고통의 흔적들을 발견한다. 당연하게도, 눈에 보이는 것은 현장으로부터 시작되기에 살인 현장으로 이어진 발자국에는 아직 피가 묻어 있지 않다. 다만 그것은 투명하게 검을 뿐이다. 고통이 시작될 곳에 고통이 차마 다가서지 못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우리가 밟고 있는 땅이 너무도 투명하게 검기 때문이다. 마치 그의 발자국이 사방을 덮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이후에 … 충분한 … 악취가 그 현장을 지나치지 못할 그 어떤 이에게 다그친다. 고함소리가 그 발길을 멈추어 세우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우리는 어렵지 않게 결과물을 내어놓는다. 마치 기계처럼 우리는 멈춰 선 이에 앞에 멈춰 서서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내어 놓는 우리의 결과물로서의 고통. 우리의 생각, 고통. 우리의 운명, 고통.
투명해서 보지 못한 것, 검게 물들어 있어 볼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배경을 이룬다. 투명하지 않은 것을 투명한 것 너머로 볼 수 있는 것, 검은 것과 검은 것을 무한히 포개어 놓는 것은 사회가 요구하는 능력, 사회의 능력, 사회적 무감각이다. 우리가 현장에서 또한 지켜보게 될 것은 바로 이러한 무감각이다. 시민은, 시민적 덕성으로부터 일깨워지는 감관을 통해 정의감을 부여받는다. 혹은, 일깨워진 정의감을 통해 그러한 덕성의 기관을 부여받는 것일 수 있다. 순번이 어찌 됐든 그는 그 무감각의 기관, 곧 무감각을 감각해야 하는 그 기관을 이용하여 이미 지나간 것을 애써 붙잡지 않으려 한다. 이것이 시민적 덕성으로 여겨지며, 일깨워진 정의는 핏자국을 닦는데 열심이다. 그것이 백화점 바닥의 껌자국처럼 덕성을 이루는 지반과 너무나 선명한 대조를 이루기 때문이다. 백화점의 청소노동자처럼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자극의 역치가 미리 설정된다. 대부분은 높게, 대다수는 낮게, 그리고 어떤 것은 재량껏. 이 역치에 도달할 수 없는 간극이 또한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감각의 파노라마 위에 엎어진다. 주어진 재량 내에서 감각의 목표가 되어야 할 것이 무감각이라는 데에서 간극은 이중으로 된다. 이 이중의 간극으로부터 일종의 상맺힘이 일어난다. 우리가 상으로서 세워진 인물에 집중한다는 사실은 이러한 간극의 이중성을 말해준다. 한 번 상으로 맺힌 것은 우리가 다시 눈을 감고 귀를 막을 때 조차도 우리 눈 안에 갇혀 있을 포로가 되기 때문에 우리는 현장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니, 우리는 그를 가둠으로 인해 그에 의해 포로가 된다. 우리는 결국 그를 놓치게 될 때까지 부릅뜬 감시의 시선으로 그 현장에 멈추어 서있을 터이다. 결국 그가 아닌 그를 놓쳐버린 자신에 대해 죄를 물을 것이고 죄에 대한 벌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사건 현장의 환경으로 굳어진다. 요정 다프네가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는 상을 맺는 사람이다. 또한 상으로 맺히지 않는 사람이다. 우리는 그 모든 상이 맺어지는 감광판이다. 사진기를 들어 피사체를 향해 셔터 버튼을 누르듯, 우리의 운명은 고통을 향한 채로 죄의 연관관계에 의해 짓눌린다. 고통이 맺어진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사람 이상, 사람 이상이 어떠한 우월을 뜻하지 않는 다만 말뜻 그대로 사람에 놓인 그저 사람인 이상, 곧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