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와 핵무기, 폭발 이후에
나는 핵폭발 이후의 분진 속에서 이 글을 쓴다.
ll.
다름 아닌 평화는, 곧 핵무기가 가져다 온 평화는 몇 가지 조건에 뿌리내리고 있다. 그러나 이 조건은 평화의 이름으로는 찾아갈 수 없는 주소에 그것의 적을 두고 있다. 비어 있는 발신자의 자리. 폭발음과 이후의 침묵은, 그와 함께 한 모든 것이 증발해버린 장소에서 한 사람이 얼마만큼 멀어져 있는가를 알려주는 지표가 된다. 침묵은 오직 침묵을 깨려고 하는 의미에서의 침묵이다. 아직 깨지지 않은 자와 못 할 말이 없는 자는 그러한 침묵에 거리를 지닌 자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크게 부서진 자, 곧 말을 잃은 자는 차라리 더욱 다가서려는 자다. 원점으로, 폭발의 영점으로 다가가 재라도 수습하려는 자이다. 그들은 금기를 깨려는 자인 동시에 이미 재가 된 것들과 함께 마저 완전히 부서지려는 자이다. 폭탄의 파괴력과 그 반경은 지금 이 순간 금기를 깨려는 자들에게서 확인된다. 그 이유는 우리가 모두 경험한 바와 같이 지금 의식되는 것이 찢어진 것을 억지로 기워 맞추는 폭력과 사람이 넝마가 된 고통이기 때문이다. 금지된 곳에 다다르려는 노력을 통해 그러한 금기와 함께 깨지려고 하는 자들은 계속해 고통받으려 하는 자들로서, 그들은 다가서려는 쪽 반대편에서의 압박인 망각하라는 명령을 거부하며 그렇게 앞으로 나아간다.
찰나의 순간 모든 것이 공으로 돌아간 듯하다. 찾아든 진공상태는, 폭발 이후, 사라진 것들의 자리가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들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공간에 깃든 힘이다. 과거는 현재에 대해 부재함으로써 현재에 대해 부채의 의무를 다할 것을 요구한다. 그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다. 곳곳이 비어진 서류를 내밀며 동그라미가 그려진 모든 곳에 이름과 주소를 써내라고 하는 은행원의 요구처럼, 아직 완전히 파괴되지 않은 모든 것들이 다시 한번 파괴될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스스로 파괴됨으로써 그들 대신 청산해주길 요구받는 것이다. 이 이유로 아직 기둥에 지붕이 붙어 있는 모든 구조물을 대상으로 불시검문이 이루어진다. 바로 그곳에 수취인 불명의 사회가 들어선다. 망각은 사회의 빚을 청산해준다. 따져 묻지 않을 수 없는 부당한 행정처분에, 여기저기서 날아든 고소장에 마땅히 적혀있어야 할 주소가 없다. 그러나 피소인이게, 이는 단순히 실재하는 법원이 아닌 사회에 의해 내려지는 사회적 심판이라는 점에서 심판의 대상이 되는 사람에게 가해질 고통은 결코 누그러트릴 수 없는 종류의 고통이다. 피할 길 없는 고통은 이미 시작된 재판에서, 내려진 판결은 재판에 앞서 미리 정해져 있었다는 사실에서, 선고를 내리기 필요한 것은 그저 목을 가다듬는 행위임을 알 수 있다. 한 사람은 판사로서 대독하기 위해, 한 사람은 밧줄이 들어설 자리를 위해. 이러한 사회에서 빚진 자들, 고소된 자들, 대독하는 자들, 방청객들과 시청자들이 맺는 총체적인 연관은, 곧 파괴된 것들이 아직 파괴되지 않은 것들과 맺는 관계 위에서 성립한다. 빠져나갈 수 없는 연관은, 곧 파괴될 자들의 이름을 빌려 이루어진 사회계약이자 최초의 파괴자가 의도한 깨끗하게 치워진 그 이후의 소강상태이다.
우리에게 드리워진 파괴의 그림자는 이러한 총체적인 의도의 종합으로서, 선험적인 것으로서의 운명이다. 출구 없는 연관은 내가 저지르지 않은 죄의 연관관계이다. 반복시키는 힘은 권력이다. 운명은 … 죄의 연관관계이다. 넌지시 제시된 평화의 실낱같은 가능성조차 그들에게는 압력으로 다가선다. 이는 그것이 지금도 계속해 시도되고 있기 때문이며, 등을 떠밀고 있기 때문이며, 그들은 이러한 평화를 폭력과 공존하기라는 명령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조건 지어진 평화는 지금 이곳에서 평화 그 자체의 개념에 반테제적이다. 이러한 명령은 지금까지 n명에게 직접적으로 가해진 고통과 국민 n명에게 분산된 폭력을 합한 것, 그 이상의 위력을 한 점에 수렴시키고 있다. 한 점에 모인 폭력이 그러한 평화를 어떤 한 사람에게 부여하는데 쓰이기 위한 것이라면, 즉 그저 한 사람의 안위를 위한 것이라면 부여될 평화야 허접쓰레기로 취급되며 그저 개개인의 주관성에 달린 문제를 잘못 접근한 정도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것이 불러올 역효과와 상관없이, 계속 반복되어온 문제이기 때문이다. 평화는 권력자에 대해 평화롭다. 그러나 만약 이렇게 수렴된 폭력이 향하는 대상이 폭발 이후의 파괴된 것을 치워-깨끗하게 만든다는 의미에서의 평화라면, 다시 말해 어떤 한 개인에 대해 그러한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전체의 평화를 강제하고자 하는 식의 평화라면, 강요된 평화는 문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깨져야 할 것이 아직 깨지지 않았다는 점이 계속해 확인되고 있는 지금, 깨지지 않아야 할 자들이 그를 대신해 깨지는 것에서 유지되는 평화는 개살구 시장의 빛 좋은 개살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핵폭발을 경험한 우리에게 언제나 새롭게 주어지는 물음은, 끈기 있게 물어야 비로소 물어지는 물음이다. 그러나 묻어진 것은 이미 묻어진 것 위에 묻어진 것으로서 그렇게 물어지지 못한 물음이다. 언뜻언뜻 비칠 매몰된 것들의 흔적은, 바로 이러한 과정의 연속에서 노출될 수밖에 없는 흔적이기도 하다. 흔적은 곧 과정이므로 이에 관한 물음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물음은, 우연에 의해 일어나는 그러한 물음이 아니라 죄의 연관관계가 운명을 이룬다는 점에서, 곧 그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경험할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공동적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는 고통이 실행시킨 힘의 물음이다. 사방에서 덮쳐 온다는 의미에서의 운명은 고통을 이 연관관계로부터 파악하게 한다. 즉 고통받는 자들이 운명에 의해 고통에 던져지는 그러한 운명에 관해 물음을 묻게 만드는 것이다. 고래로 구축된 연좌제는, 이 죄가 결코 죄를 물을 대상에 자신을 직접 적중시키려 하지 않듯이 바로 그렇게 애초에 의도된 바로서의 죄의 연관관계를 말하고 있으며, 이것이 결코 직접성을 드러내지 않는 것에서 드러나는 성격은 오직 주어진 운명을 지속시키는 집요한 성격을 띤 물음일 뿐이다. 이러한 점에서 새로운 물음은 우리가 갚아 물어 주어야 하는 물음이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계속해 깊게 묻어지고 있는 물음이다. 이것은 청산되지 못한 과거이기도 하다. 따라서 물음은 청산인 동시에 속죄이다—그러나 속죄는 용서받기와는 관계하지 않으며 물음이 언제나 용서의 희망 없이 새롭게 되는 물음 설정이라는 점에서, 오직 그러한 물음인 한에서 속죄는 나 이외의 모든 이의 죄에 대한 속죄로서 속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