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은 자유이다
나는 핵폭발 이후의 분진 속에서 이 글을 쓴다.
lll
이것에 대해, 괴물의 이름을 그 이름대로 부르는 것이 금기시되는 원시적인 상황을, 무력하게 존재하는 한 인간에게 주어진 어떤 선택지가 착각과 함께 이괴물이 잠시 머문 자리를 영속화하는 작업에 의해 결정되는 모습을 떠올리는 것으로 충분하다. 다름 아닌 괴물은 꼭 동굴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군가 괴물의 이름을 입 밖으로 내어 자칫 동굴 밖으로 괴물이 기어 나올 수도 있다는 공포에 휩싸이게 되는 것은 이차적이다. 애초에 그것은 그곳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공포가, 즉 괴물 대신 괴물이 사는 동굴에 대해 공포를 느끼는 것이 인간에게 더 나은 선택지가 되는 이유는 명확하다. 오늘날 소수의 자유로운 인간들이 자신의 생존에 직결되었다고 믿는 시험이 그것 자체로 한계상황으로 다가온다는 점에서, 선택지의 존재 유무가 그의 운명을 결정짓는 요소가 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다시 말해, 괴물에 대한 공포가 그를 땅에서부터 움츠러들게 할 뿐만 아니라 그가 그것을 생각하는 것에서조차 그가 그것에게 잡아먹히게 하기 때문이다. 괴물과 그것을 품는 동굴에 대한 이러한 착각은 동시에 그 동굴 밖의 환경을 이루는 착각과 같다. 인간은 죽는 그 순간에서조차 거짓되게 죽을 능력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진실로 죽음을 맞이해야 할 때, 그 순간 깨트려야 할 착각은 맞이함의 자유이다. 맞이한 것은 맞이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에게 착각이 곧 자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착각은 자유이다.
따라서 그것을 그 이름대로 부르지 못하는 것과 그것이 동굴에 있다고 믿는 것, 그리하여 동굴 앞에 제단을 쌓는 것과 그 제단에 희생양의 피를 뿌리는 의식은 앞서 말한 두 조건에 상응한다. 바로 여기서 ‘상호확증파괴’는 자신을 밝힌다. 이는 우리가 물어 주어야 할 물음인 동시에 그 대상으로서의 조건이다. 그것은 그것이 있어야 하는 곳이 아닌 곳에서 이렇게 말한다. 세상은 여차 저차 한 이유에서 평화롭다는 식으로 그 조건을 드러내는 것이다: 핵무기를 통해 상대를 멸망 상태로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 일차적이며, 공격받은 이가 어떻게든 상대에게 핵 보복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는 믿음은 이차적이다. 이러한 조건 하에서 평화가, 이 두 가지 믿음이 교차한 자리로부터, 지나쳐 간다. 따라서 잘못 불려진 평화는, 2차 타격능력의 여부를 따지는 과정에서 ‘적어도’ 불려질 수 있는 그러한 평화이다. 그러므로 평화는 흔적이다. 이러한 상호확증파괴에 대한 믿음은 대륙간 탄도미사일의 개발과 발전, 그리고 미사일 방어체계의 개발과 발전에서 사그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이렇게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모습이 잠수함의 특징을 그대로 빼다 박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즉, 갑자기 발사될 미사일에 대한 공포만큼이나 갑자기 떠오른 잠수함에 공포를 느껴야 할 상황이 도래하게 된 것은 기술발전이 그리는 이러한 연속선에서 그 모습을 내보이는 것이다. 평화는 수면 아래에 그 모습을 감추고 있으며, 평화는 수면 아래에서 그것이 스쳐간 자리로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