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을 불법화하는 것을 막아서기 위하여
세상, 멈춰있는 것은 없다는 사실이 접미사 -화化에 의해 강조된다.
강조는 불필요한 것일지 모른다. 대개 -화 앞에 들어서게 되는 명사들이 그 이후를 겨냥하게 될 가늠자로써 총구와 대상 a를 잇는 가상의 선을 긋게 될지라도, 우리 인간은 역사 이래로 타깃에 적중한 것의 정도를 두고 트로피를 수여받는 명사수였다기보다는 생을 이어나가던 중 생을 추수해 나아갔던 다만 인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최종의 목표가 되었던 것은 사슴과 꿩, 토끼, 그리고 쥐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의 목표가 되었던 것은 그 자신의 (자기)보존이다. 살아남아 '살아남기기'가 목표다. 이러한 원리를 확장시켜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다만 인간에 불과한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 역시 다만 사회일 뿐이다. 즉, 마찬가지의 의미에서 한 사회의 목표가 되는 것은 민주화와 공업화, 선진화, 그리고 그러한 사회의 총체적인 진보가 아니다. 그렇다면 목표는 뿌리인가? 아니라면 목표는 결실인가? 아니, 혹은 목표는 오로지 목표인가? 오히려 강조가 되고 있는 것은, 사회-자체로서의 목표를 그 사회가 '체계로서' 시간적으로(역사적으로) 영구히 표류하는 것에 있다고 주장하고자 할 때 조차도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닌 이에 대해 영원히 물을 수 없다는 사실이라는 점이다. "사회에는 주소가 없다." 다만 오늘날 사회의 위기를 알리는 뉴스 소리는, 아드레날린이 추동하는 인간의 심장 박동 소리와 같이, 특정 조건에서만 들리는 강요된 소리이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 대해 살아있음을 확인해야 하는 바로 그 상황이 우리에게 확인시켜주는 내부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인 것이다. 즉, 우리가 우리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때는, 혹은 들어야 할 때는, 아니 그냥 그것이 그렇게 들릴 때는 전적으로 살아 있는 순간으로서 삶 속에서 매번 망각되어야 하는 순간들이다. 점점 더 고조되면서도 이와 동시에 열심히 잊혀져야만 하는, 결국 지나칠 수 없는-지나쳐야만 하는신호로서의 뉴스는 사회가 아직 열심히 살아 있음을 '주장하는 소리'이다. 바로 이 부분, 우리로 하여금 쓴웃음을 짓게 만드는 부분이 여기에 있을진대, 인간이 다만 인간으로서 살아가고자 사회가 사회로서 도입되었음에도 사회는 그렇게 '사회로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과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이 뉴스는 우리에게 매번 알려주고 있다. 뉴스에 나올 수 있을 만큼이나 충분히 눈을 끌어당기는 사건들은, 곧 시청률이 담보된 위기는 사회적 위기로서 오직 위기로 인식된 위기로서, 건강염려증을 앓는 사람들이 새로 소개된 병에 대한 지식을 통해 아파하며 끊임없이 자신의 건강을 확인하듯, 사회를 확인시켜주는 '사회적으로 확인된 위기'이다. 그러나 만약, 예를 들어, 한국인이 앞으로도 꾸준히 계속해 반복적으로 자살을 한다면, 이제까지 꾸준히 계속해 반복적으로 자살해왔던 것처럼 바로 그렇게 앞으로도 계속 그러하다면, 자살은 지금 한국 사회에 속한 내가 어느 시점부터 더 이상 한국의 영예로운 자살률에 별 감흥을 느끼지 않게 되었듯이 바로 그렇게 사회 역시 이를 위기로 인식하지 않게 될 것이 분명하다.
웃음은 '사회의 역설'에도 불구하고 기적적으로 사회가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지어진다. 다시 말해, 인간이 그들의 자기 보존을 위해 사회를 형성했지만 역으로 인간의 삶 자체가 전체 사회로부터 위협받는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의 삶을 위협하는 사회에 강제적으로 속박된 사회-구성원으로서 개별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제 단지 웃으며 기다리는 것 외에는 없는 비극적인 모습이 지어 올리는 웃음이다. 삼포, 사포, 오포, 육포는 심심하게 웃긴다. "0.84"는 정말 웃긴다. 뉴스는 이렇게 사람을 웃긴다. 때론 심각한 뉴스가 가장 웃긴다. 오늘날 가장 큰 비극은 가장 잘 쓰인 희극과 구분될 수 없는 지점에 놓이게 되었다. 비극을 정초한 이에게 이러한 상황은 비극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 이유는 비극에서 가장 위대한 인간이 가장 사소한 실수로 쓰러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의 실수는 그의 위대함과 관련을 맺는다. 여기 비극에서 위대한 인간은 도덕적인 인간이다. 그러나 위대한 인간은 도덕적으로 완벽한 인간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일관된 인간이다. 도덕적으로 일관된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사소한 실수는 실수를 만회하고자 하는 것에서 가장 치명적인 것으로 된다. 치명적인 실수는 위대한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사소한 실수이다. 이렇게 지나간 순간적인 실수는 그에게 일어났던 실수가 아니라 나로 인해 발생한 실수로, 계속해 발생하며 일어나고 있는 실수로서 이후의 모든 진행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게 된 원인으로 기대어 있는 '운명으로 상승된' 실수이다. 위대함은 우연이 필연으로, 순간이 영원으로, 계속해 고통을 갈구하는 듯한 그의 사디스트적인 면모가 벼려내는 일관성으로서, 그의 이런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위대하게 된 것이다. 그는 고통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고통받지 않는 상황을 가장 고통스러워하기 때문에 선택의 순간에 마주해 언제나 가장 크게 고통받기를 선택하는 인간이다. 위의 비극의 정초자는 비극이 희극으로 되는 순간까지 계속해 비극을 밀고 나가 이렇게 주장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비극이라고 말이다. 그는 그렇게 비극이 주인공이 되며 동시에 그가 비극을 밀고 나간 만큼 딱 그만큼 그는 위대해진다.
오늘날의 비극은 희극으로서 비극 이상이 된다. 하지만 한 때 위대했던 모든 인간상들이 돈키호테 이후 웃긴 사람들로 되고 말았다는 사실에 고개를 돌려서는 안 될 것이다. 이렇게 웃긴 위대하게 우유부단한 사람들이 도태된 오늘날, 오늘날 위대한 인간상은 주어진 운명을 실수처럼 여기는 사람에게서 발견된다. 이러한 위대함은 그러나 누군가에 의해 정초 된 개념도 완성된 개념도 아니다. 즉, 오늘날의 위대함은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속성들도 아니고 추상화된 모습을 하고 있지도 않다. 이것은 주어진 운명에 마주해, 실수로 깨트린 유리의 파편 조각들이 모두 저마다 다른 모양으로 조각나 있는 모습처럼, 산산이 깨진 모습을 하고 있다. 오늘날 위대한 이는 운명을 그만 손에서 떨어트린 사람, 실수로 깨트리고만 사람이다. 여기에서 운명이 지극히 소중한 것으로서 다뤄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 그러나 그는 그러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부르주아적 도덕관에 충실히 따를 때나 가능한 주장이다. 이러한 생각은 위험한 생각이기도 하다. 스스로의 운명에 대해서도 인식하기를 그르치는 것에 나아가게 하는 이러한 생각은 직관에 가까운데, 우리는 위대한 이가 운명을 사소하게 다루고 있다는 이러한 직관에 빠져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직관은 사소한 것을 위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의 위대함은 지극히 별 볼일 없는 것인 운명을 딱 그 중요성에 걸맞게 '사용'하며 실수로 잃게 된대도 이를 실수로 받아들이는 운명의 운명적 '활용'에 놓여있다. 그는 깨진 것을 쓰레받기에 주어 담아 조각들에 의해 야기될 '나의 것이 아닌' 상처와 고통을 방지한다. 바로 이 모습은, 칠십만 원과 삼만 원 그리고 사천 원 혹은 칠천육백오십 원으로 깨져있는 모습이다. 깨트린 사람이 깨짐으로써 깨진 것을 깨트리는 이 모습은 사회에 의해 박살이 나버린 한 인간이 파편으로서 자신의 파편을 뒤치다꺼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운명은 그에게 사소한 것이지만, 그에게 지극히 사소한 것이 지극히 사소한 것으로서 충분히 그리고 충실히 소중스럽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것 중 가장 귀중하며 또 정교한 것인 사회는 앞으로 인간이 인간으로서 써내려 갈 그 어떤 웃긴 이야기들 중 가장 저급하고 저질적인 웃음을 유발해내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나를 잊게 만드는 저질적인 웃음 속에서 서술될 수 없는 고통을 겪은 인간이 잃어버리는 것은 꼬리표이다. 적어도 여기에 무엇이 있었음을 말하는 증거의 상실이다. 고통의 역사에서, 삶은 매번 비극이 됨으로써, 그렇게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들이 그럼에도 언제나 계속 일어나고 말았음을 알리는 증인이 된다. 삶은 개별자에게 그의 고통이 되풀이되지 않게끔 고통을 전형화시키는 것을 그 목적으로 두고 있다. 너무나 구체적이며 개별적이고 특수한 하나의 비극이 비극으로 완성되어 인류 전체의 서고에 수장된다. 그러나 전형화된 고통은 한때 위대했던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웃음거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제 사회 속의 모든 것은 각자가 각자를 적중시켜야 할 임무를 맡고 있을 뿐이다. 전형적으로 된 것은 그렇게 그것에 고유한 임무에서 배제되고 말았다. 민주화는, 사법의 민주화도 아니고 대학의 민주화도 아니고 경제의 민주화도 아닌 다만 이 원리의 자기 보존인 셈이다. 그 이유는, 인간이 민주를 목표로서 적중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인간이 그 자체로 공업과 선진사회를, 모든 진보를 적중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저 사회 속에서 자기 보존하며 사회적 체계의 기능 일부를 떠안으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사회 그 자체에 있어서도 민주화와 공업화는, 이념으로서, 인간의 자기 보존과 연관해 여전히 쥐나 토끼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논리의 자동으로 조국 선진화와 사회 진보는 사슴과 꿩이 될 터이다. 쥐나 토끼, 사슴과 꿩은 계속해 쥐나 토끼 그리고 사슴과 꿩으로 그들 스스로를 보존해야만 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이는 앞서 말한 각자 스스로를 적중시킨다는 것의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한 종의 멸종은 각 개별 종에게는 자기 보존의 원리에 대한 금기를 상기시키는 것으로 기념되어야 한다. 멸종한 종의 학명은 최종적으로 승리한 종의 박물관에 전시될 전혀 전형적이지 않은—어떤 우연한 뼈모듬에 실수처럼 붙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