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미신
당은 당원에게 과학을 가르친다. 이 과학은 오늘날 이미 충분히 낡은 것으로 교육되고 있지만 이와 동시에 그것에 걸맞지 않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서 잔존해있는 미신에 대해서만큼은 언제나 새로운 것으로서 계시되고 있다. 과학은 환하게 웃으면서 말한다. 빛이 비치는 동산의 정상에서 말한다. 이를테면 선풍기를 틀고 자도 절대 죽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러나 선풍기와 급사의 관계에서 그들이 미신으로 치부하고 있는 것은 양자 사이의 인과관계가 그 근거 없음으로 인해서 완벽하게 실패하는 지점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이 관계를 이루는 개별 요소들이 너무나도 충분히 과학적으로 설명되고 있는 지점에 있다. 산소의 부족 혹은 기압의 차이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머지않아 낡은 것으로 될 오늘날의 과학은 모든 현상에 대해 충분히 과학적으로-통계학적으로-이야기하기 때문에 선풍기를 틀고 자면 죽는다는 주장을 다음과 같이 분석할 것이다. 선풍기로 인해 야기될 화재위험, 감전 위험, 낙상 위험-그러나 이제 에어컨을 틀고 잘 그들과는 관계가 없는 위험- 등을 들어 선풍기와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오늘날의 과학은 통계학적으로나마 열려 있고자 하는 것이다. 선풍기를 틀고 자면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은 여기에서 이렇게나 과학적인 주장이다. 따라서 위에서 계시되고 있는 낡은 과학은 미신에 대한, 곧 한 때 과학이었던 오늘날의 사이비 과학에 대한 승리의 예언이다. 그러나 이는 곧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는 모든 패배 가능성에 관계된 오늘날의 과학에 대해서는 굳게 닫혀 있는 예언인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그들에게 언제나 승리가 예언되고 있다. 당은 당원에게 계속되는 승리를 예언한다. 마치 그렇게 정해져 있기라도 한 듯이 말이다. 이러한 자신감, 이러한 지속가능성을 담보해주는 것은 미신의 구조적인 재생산에 달려 있다. 그들의 승리는 그들의 과학이 언제나 승리할 수 있는 전과 항상 같은 모습으로 등장해야만 하는 미신의 재생산에 기대어 있다. 박정희 신화가 예가 될 수 있다. 민주적인 것은 이 신화에 대항하여, 과학으로서, 마치 영웅처럼 등장하였다. 하지만 영웅은 그가 배당된 신화 밖에서는 그 존재가치를 곧바로 잃어버리기 때문에 결코 신을 죽이는 단계로 나아가지 않는 영웅이다. 영웅은 신화 안에서만 영웅이다. 그는 간계를 통해서 그때그때 자신을 위협하는 상황으로부터 간신히 탈출하기에 바쁘다. 이 과정에서 그는 때론 신을 골려먹기도 하고, 신을 속여 이용해 먹기도 하지만 이는 또한 신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행동일 뿐이라는 것을 그 역시 충분히 알고 있다. 그는 그가 대항하는 신과 이해관계의 합치를 이루며 해당 배역을 소화해 낸다. 이곳에서 외눈박이 괴물 박근혜를 향하여 '아무도 아닌' 바로 나를 외친 촛불의 유일무이한 대변자는 나중을 위하여 힘을 비축하는 듯하다. 그는 외눈박이 괴물이 잡아먹은, 또한 그를 그곳까지 인도해갔던 노잡이들을 훌훌 털어 버린 채, 행선지를 향한 노정을 이어 나간다. 그는 슬프게도 여정의 종료를 도착한 시점에 바로 선언하지 못하였다. 이는 모두 잔존해있는 세력을 숙청하기 바빴기 때문일 것이다. 계속되는 여정이 적폐청산의 이름으로 행해진다. 결국 모든 것을 쓸어 버린 이후, 몇몇 살아남은 노잡이들과 죽은 노잡이들의 가족이 그에게 자신의 몫을 주장했을 때, 그가 줄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을 것인데, 이는 나중으로 기약된 것이 이미 충분히 지연된 정의의 실현이 아니라 그때그때 달라져야 하는 형태의 정의의 필요성이기 때문이다.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근거 세우는 과학은 오늘날 낡고 병든 것으로 되어 안타까운 시선을 받아야 마땅하겠지만, 어째서인지 이러한 변신하는 정의에 의해서, 신화 안에서 계속해 영웅이 되길 바라는 노욕에 의해서, 경멸되고 있다. 오늘날 이러한 상황에 대해 '과학이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충분히 구린 것에 대한 순간의 경멸이 이러한 경멸적인 상황이 계속해 반복되는 구조로 인해 통계적 유의미성을 획득했기 때문에 충분히 뒷받침되고 있는 주장인 것이다. 그 당에 대한 나의 경멸은, 경멸에 들어 있는 주관성을 충분히 배제할 만큼의 근거를 가진, 너무나 객관적인 경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