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나 '중립'을 표방하는 것이 사랑받고 있다. '중립'은 중립을 표방하는 것을 마찬가지로 사랑하고 있다. 그러나 '중립'은 오직 사랑에 대해서만큼은 중립적이지 않는 듯하다. 사랑받는 자는 그가 받은 사랑만큼 오해받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에 대해서 그가 사랑하는 만큼 오해하고 있는 사람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그는 무엇보다 사랑을 사랑하는 사람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사랑을 사랑하기는 사랑의 본질과 가장 멀리 떨어진 것으로서 이는 나를 사랑하는 사랑인 나르시시즘과 특징적으로 구별된다. 중립은 오해된 사랑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한 사랑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입장이 바로 그가 서있는 중립이란 토대인 것이다.
중립은 무한한 사랑이다. 그러나 사랑은 한계 짓는 적의이다. 결국 중립은 미워하는 마음이다. 중립은 분노한 표정에서 경계가 정해진 것, 셀 수 있는 것, 사고에 있어서의 경중을 따져 묻는 것을 무한히 부정적으로 그 시선에서 꿰뚫고자 시도한다. 한 사람이 그가 사랑하는 사람을 가장 사랑해야 할 때, 분노한 이들은 무리를 이루어 이 사람을 가장자리로 데리고 간다. 이곳이 바로 참의 영역이다. 이 영역에서의 어떠한 한계는 억지가 부리는 이해의 마법이다. 미워하는 마음은 그 대상에 부단히 다가서고자 하고 또 그 대상에 자신을 옮겨 놓는데 주저함이 없다. 오늘날 진정 중립에 서려고 하는 자는 감히 이 첨단의 시대에 주술사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역행자이다.
여기서 사랑을 한계 짓고자 하는 시도는, 이렇게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사랑에 대해서가 아니라 사랑의 반대편에 대해서도 말해야 하는 자에게 관철되는 억지이다. 사랑이 마음이라면, 혹은 사랑이 생각이라면, 그 어디 쪽에서나 사랑은 무모하고 무리한 고집이다. 사람을 미워하기 위해서 한 사람은 고집스럽게 그에 매달려야 할 것이다. 사랑은 자체로서 사랑에 대해 따뜻하지 않다. 사랑은 추위에 떠는 이에 대해 따뜻하기 때문이다.
"말은 기호가 아니라 형상에 다가서야 한다."
미워하는 마음에 대해 어디까지나 얼굴을 가린 채 말을 하고 있는 중립은, 다만 자체의 것(중립)을 동어반복하는 허울로서, 언제나 거리낌 없이 드러낸 채 말하려 하는 자를 그곳에 숨어 울상을 짓게 만들고 있다. 이는 말이 항상 표정을 짓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거짓 중립은 이렇게 말을 반복하며 표정 없는 얼굴을 하고 있다. 이는 포커페이스를 하고 있는 프로 겜블러에게서 자주 ‘발견되는’ 통계적 계산이라는 포지셔닝에 다름없을 것이다. 즉, 기호로서의 중립이 표방하는 기치는 백기로서 나부끼며 전장의 한 복판에서 미리 항복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슬픔을 받아들이는 능력은 —이는 표정을 읽는 능력인 동시에 다른 한 사람의 표정에 자신의 표정을 동화시키는 능력이다—학습의 영역에서 마땅히 전달되어야 하는 '권위를 지닌 지식'이 관장하고 있는 능력이다. 이러한 이유로 슬퍼하는 사람은 슬퍼하는 동안에 선택해야 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놓아버리든지 전달하든지 어떻게든 그는 슬픔을 쥐어야 한다. 손이 하얘질 만큼 울어본 사람은 이를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알기도 전에 알고 있었으며 알려고 하기도 전에 그렇게 알게 된 사람이기도 하다.
붉은 깃발과 푸른 깃발이 모두 붉어질 때 물 빠진 백기를 드는 것은 바로 왕들 간의 전쟁이다. 언제나 준비되어 있어야 하는 자들이 품에 안고 있는 ID카드처럼 미리 정해진 규칙은 논쟁을 종결시키는 마법이다. 이 마법은 태곳적부터 전해져 내려왔다. 지지 않고 또 이기지 않으며 싸우지 않고 지지 않는 싸움은 토론 없는 회의의 모습으로 이어져왔다. 양쪽에서 이러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지붕 같은 지붕이 없는 곳 아래, 나무 아래, 동굴 속에선 아직도 격론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입고 있는 옷은 해지기 마련이며 사랑하는 마음은 곧 찢기기 마련인 것은 나뭇가지에 매달리는 법이, 곧 아래 동네의 법 때문일 것이다. 이곳에는 승패가 명확하다. 이것이 선명하게 갈리는 경계 사이의 깊이만큼 미워하는 마음만이 그를 평안케 한다.
한 사람이 취하는 참에 대한 태도로부터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존재론적인 불안함이다. 참을 붙잡으려 함은 불안하게도 그것의 소유 안에서 보호받고자 하는 것, 소유한 것에 대한 믿음으로 자신을 근거 세우는 것, 소유권이라는 법적 권리에 천착하는 것을 통해 존재를 서류 안에 가두는 모습이다.
"인식하기는 소유하기이다."
바로 이러한 태도로부터 안정감을 느끼고 대상을 취하고자 하는 자는 참을 소유하려 드는 자이다. 그리고 이 태도는 언제나 미리 용서받으려는 듯 웃으며 사과할 준비를 하고 있다. 미안하지만 나는 이것을 우연히 손에 넣게 되었노라고. 따라서 어떠한 일들이 발생하더라도 다만 예상치 못한 결과에 불과했다고, 대상을 인식으로부터 떨어트려 인식은 다만 인식의 소유물로서 인식하기의 대상은 부작위 점유물로써 때에 따라 시시비비의 대상이 되고 마는 것이다. 중립은 이 인식하기를 실행하는 것에 대한 심판의 대이다. 중립은 사랑의 법정이다. 그러나 이곳에 피고인으로 선 자는 언제나 유예를 선고받고 있다. 그는 참에 대해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가서나 어디까지나 출발한 곳에 다시 되돌아감으로써 점점 더 참으로부터 멀어지는 자이며 이 멀어짐을 대상과의 거리로 설정해 사랑을 심판하는 자이기도 하다. 그는 미워하는 마음을 미워한다. 그는 다만 사랑을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일 뿐이다. 이에 반해 사람을 사랑하는 자는 미워하는 마음으로 사랑을 미워하는 사람일 것이다. 이 자에 대해 언제나 유죄를 선고하는 곳이 바로 사랑의 법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