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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래로 Jun 18. 2021

패닉-셀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는 공황에서 서로 만난다. 우리는 진정으로 돈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돈에 대한 사랑으로 묶인 집단의 결속은 임박한 위험을 언제나 과소평가하게 한다. 개인이 공황의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다면, 중요한 것은 임박한 위험의 실제성이나 예상된 위험의 위험성에 있지 않고, 그가 그때까지 위험을 과소평가할  있었던 돈에 대한 감정유대가 끊어졌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지시한다. 경제적 공황이 발생하고 개인의 심리적 공황이 그에 뒤따르는 것이 아니다. ‘공황이라는  자체가 집단적 공포로서 리비도-유대의 상실을 의미하므로 한때 위협조차   없었던 것이 이제 위협적인 위험으로 떠오르면서 아주 사소한 계기로도 언제든 공황이 일어날  있다는 공포, 이러한 공포 자체가 공황의 본질로 된다. 공황은 이제 개인이 위험을 홀로 떠맡는 상태로 이해되며 이로써 위험은 언제나 과대평가될 것이다. 공포는 ‘개인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과대평가되고 있는 어떠한 위험이 다만 ‘사회적으로 인지되고 있다면 그것은 개인에게 과소평가된 것임이 분명하다. 지구온난화 등이 예가   있을 것이다. 상호 평가의 괴리로 인한 객관성의 부재가 객관적인 상황을 주관적으로 경험하게 한다. 이곳에서 공황은 관리가능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경제적으로 그러한 관리가 실패할 수밖에 없음이 이제 자연스럽게  것에서 하나, 그럼에도 성공적으로 극복한  기만에 성공했던 것에서 , 마지막으로 공황은 임박한 위험으로 상수로서 제시되고 마치 바라마지 않는  기다리는 새로운 이념의 패배적 성공에서 마지막 근거를 끌어올  있을 것이다. 오늘날 혁명은 적어도 지속가능한 것의 안티테제를 구성할 능력을 상실했거나 혹은 그렇게 무능력한 것으로서 오직 한없이 무능력하게만 혁명적일  있을 것이다. ‘지속 가능한 (윤리적 환경적) 성장이라는 구호안에 나타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기능은 위험에 대한 ‘위험의 임박한 위험이라는 심리적 예방접종이다. 다시 말해 지속가능을 말하는 , 이것이 문제시되고 있다는 사실이 자체로서 실제적인 공황을 알리고 있지만,  인식되지 못한 공황의 잔재를 긁어모아 만든 백신이 심리적으로 형성한 항체가 공황이 와도 ‘아무렇지 않다’, ‘어쨌든 상관없다 식의 살아있음 자체가 살아-남았음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집단 면역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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