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장과 경기장
적중은 순간일지라도, 아니 오히려 그것이 순간에 일어나기에 순도 높은 정지상태와 결부된다. 이러한 특성과 함께 정지상태와 그 자체로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을 것으로 보이는 우리의 운동하는 삶 일반을 계속해 적중과 관련지어 보았을 때, 적중은 그렇게 찬장 안의 트로피를 얻어낸다. 가장 찬란했던 순간을 지속시키는 방법은 그저 그 순간에 정지해있는 것이므로 트로피의 먼지를 털고 있는 매 순간이 다시 먼지를 일으키며 a가 달려 나가는 듯 보이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계속해서 먼지를 털어주어야 하는 트로피의 관리라는 것은 살아 있는 상태의 자투리에 기생해있는 서서히 죽어가는 상태에 다름 아니다. 예를 들어 근대화와 민주화는 ‘미완의 프로젝트’로서 여기서 다시 한번 강조는 불필요하다는 인상을 전달한다. 이것은 어딘가에서 이미 한번 이룩된 것이며 그 언젠가 우리도 한번 성취해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 한 번이라도 근대를 적중시켰는가? 민주를 적중시켰는가? 이러한 자체로 움직이는 미꾸라지 같은 질문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이 흙탕물 안의 이것을 언제라도 필요에 따라 적중시킬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러한 능력을 담보하는 빛나는 트로피를 쟁취해낸 적이 있었는가? 저기 높게 치켜든 갖가지의 트로피에서 럭셔리로 된 것에서 흔히 보이는 정갈한 빛깔이 뿜어져 나온다.
질문에 대한 대답에 앞서, 내가 ‘미완’을 말함으로 인해서 나에게 일종의 미리 설정된 목적이 있지는 않은가—이는 오해이다—하고 여러분은 다음과 같이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운동하는 것은 움직이는 대상과 움직이는 목적이 함께 어울리는 춤판 자체이지 않겠냐고 말이다. 그리고 그 춤판은 낡은 것으로 된 지 참으로 오래이지 않냐고 반문하는 식의 대답을 말이다.
완성되지 않은 것을 완성시켜야 한다는 목적에서 대상 a가 저만치 멀어지고 있는 풍경이 기실 눈앞의 가상인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순간 목적이 되어야 하는 것은 그저 그러한 완성이 아니라—즉 대상이 멀어지는 만큼만 뒤쫓아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에서 완성된 것으로서의 가상이 아니라—그것에 대하여 새로운 새로운-가상으로서의 완성이다. 말 뜻 그대로 가짜 형상이라는 말을 통해, 그리고 이제부터 가상을 강조할 것이라는 사실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어쨌거나 사실을 강조한다는 것 자체에는 강조하는 것을 통해 은폐시키는 프로파간다가 들어있음으로—가상이 발하는 비실재적인 빛으로부터 피할 길이 없어 보인다는 사실이다. 내가 애초에 목적에 두고 하고자 하는 것은, 이렇게 사실적으로, 하고자 했던 것으로 반사될 것이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완성되지 못한 것, 한 때 적중했던 사실이 영원한 도돌이표로서 시간을 되돌리게 하는 그러한 무한한 미완성을 부르는 주술을 다만 주술로서 주술적으로 지시하는 것이 내가 목표로 하지 않은—이는 이것이 목표로 될 수 없기 때문이다—목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나는 오늘날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어떤 언어들의 집합체에 비추어 내 언어를 닮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젊은’ 정치인과 ‘늙은’ 정치인, ‘보통의 일반적인 남성’ 정치인 등이 정치권에서 사용하는 정치인의 이미지는, ‘내가 나와 전혀 닮지 않은 사람들을 대리하여’ 정치를 하는 것은 애초에 ‘나이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기 때문이며’ 동시에 ‘바로 이 나이 따위를 초월하고자 하는 것에서 비롯되었으며’ 그것은 정치가 이미 낡았고 곧 낡을 것이라는 정형화된 공식으로부터 도출된 보통과 일반이라는 선명한 해상도로 정치인을 인화한 것이다. 오늘날 정치인은 이미지로서 자명함의 거울로 된 정치란 것에서 반사되고 있다. 젊든 늙었든 ‘정치인’의 이미지를 떠올려보면 생생한 예를 멀리 갈 것도 없이 바로 머릿속에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곳에서 그러한 시도를 하고자 한다.
찬장에서 기능하는 것, 즉 적중된 것, 이미 너무나도 강조되어 더 이상 사실로서 기능하지 못하고 있는 가만히 있고자 하는 것에 대해 부정하는 자는 가만히 있게 만드는 것과 가만히 기능하는 모든 것에 대해 한껏 무능해지고자 하는 자이다. 그는 동시에 그러한 무능력함을 통해 혁명의 발걸음을 내지르는 자이기도 하다. 이와 반대로 유능한 인간은 초월적 인간으로서 이미지화되고 말았다. 이러한 이미지들의 지각을 상회하는 사실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포기하는 것을 미리 포기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오늘날 포기하는 것조차 능력으로 되고만 것일지 모르겠다. 우리는 피곤한데, 그에 더불어 유능함에 대한 강조는 또한 잠시도 쉬지 않고 피곤할 정도로 반복되고 있다. 기민하고 약삭빠른 자는 느리고 고통스러운 어떤 작은 발걸음을 일회적 사건으로 만든다. 이는 이들이 이렇게 사건으로 된 것의 해결 한건 한건에 인센티브를 부여받기 때문이다. 무한히 지연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 정지를 통해서만 끝내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적중된 정도의 높고 낮음에 따라 클로즈업, 되감기, 천천히 감기 등의 영상기법적 테크닉이 뒤따른다. 올림픽에서의 마이크로미터, 밀리세컨드의 차이가 불러일으키는 기적과 함께 단상 위에 가만히 서 있을 때 그 잠깐의 정적조차 참을 수 없는 것인 양 크게 울리는 영광은 이러한 테크닉의 발생의 인과관계에 한쪽과 다른 한쪽 끝을 담당하고 있다. 이미지는 기적과 영광을 위해 기술적으로 만들어진 가상이다. 가상에서 고정되어 있는 것에는 이미지라는 압정이 박혀있다. 그러나 가만히 있는 것이 계속해 가만히 있고자 하는 것과 그것이 무엇이 됐든 계속해 나아가고자 하는 관성을 구분하려고 하는 의도는 자못 불순하게 여겨진다. 이미지가 해체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둘 사이의 구분 역시 세상이 바랐던 이제는 보편화된 테크닉이 담당하는 기능이 되었다. 여기서 구분은 분열이자 자기 분열을 의도한다. 곧 오해를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것이다. 정지해 있는 것 또한 일종의 관성이다. 관성에 대비되는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 오해이다. 내가 어떤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나는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사실이 강조되는 영역을 경유한다. 우리는 적중시킨 그 대상을 불러 세우는 이름으로 이름 대신 천분의 일초 단위의 기록을, 이름 대신 그에 딸려오는 특전을, 곧 트로피를 진열해 나아간다. 그것은 하나의 대상이 되어 그것-아닌-어떤 것이 되어 끝없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내게 주어진 나를 가리키는 칭호가 나-아닌-어떤 이를 지목하는 것과 같은 기능을 하게 된 이후, 다시 말해 대상이 이름에 부합하지 않게 된 상황에서 이름 불리는 것에 절대 익숙해지지 못할 그럼에도 여전히 나인 자신을, 이름을 잃게 된 그 상황에서 우리가 겪게 될 황망함을 떠올려보도록 하자. 우리는 모두가 모두를 이방인으로 취급하는 나라에 떨어진다. 이름이 없는 인간으로 가상세계에 떠오르게 되는 것이다. 나는 기록이자, 트로피에 부과된 강제된 기쁨이다. 나는 오해에서 비롯된 ‘꼭 필요한’ 논쟁의 방청객이다. 오늘날의 콜로세움은 계속해 같은 방향과 속도로 운동장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 일견 멈추어 서있는 듯 보이는 대상이 지금 이 순간 이후에도 그 길을 따라 걸을 것인지는 그를 멈추어 세워보지 않고서 알 수 없다. 멈춤은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멈추지 않고 보내주는 것, 건드리지 않는 것, 하던 것을 계속하게 내버려 두는 관찰자는 거대한 실험의 주관자로서 그 자리에 서있다. 그는 멈춤을 한 번도 멈추지 않는 자이다. 오직 그만이 멈춘 채로 움직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