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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래로 May 01. 2021

서른 직전의 어느 날에

2018.01.25에 쓴 일기

나는 반 백수다. 반백수의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답답할 때가 많다. 이 답답함은 세상의 부산스러움과 시끌벅적함, 그리하여 내 눈과 귀를 막는 그런 답답함은 아닌 듯싶다. 생각건대, 이 답답함은 눈 앞에 펼쳐진 광대한 가능성의 사막으로부터, 빈틈없는 공허함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이 부산스럽고, 시끄럽고, 무엇이든 어떻게든 넘쳐나는 세상에 어디 하나 내 자리가 없을까 하는 아쉬움인 것이다. 내가 무엇으로 태어났든 나는 현실의 벽을 파고 들어가야 하는 바늘이 되어야 하는 것이고, 또한 쓰임을 받기 위해서는 그 좁디좁은  바늘귀를 기꺼이 통과해줄 실을 만나야 하는 것이다. 그 무엇보다도, 이 가능성의 사막에서 바늘부터 찾는 것이 먼저이겠지만 말이다.


현대사회가 오늘날 우리 세대에게  가장  거짓말은 아마도 ‘누구나 무엇이든   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이다. 이것이 나를 질식케 한다.  그릇된 희망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네발짐승들이 하늘을 꿈꾸다 끝내 벼랑으로 떨어져 다리를 절게 되었는가 말이다. 또한 얼마나 많은 날개 달린 짐승들이  날개를 아끼고 아끼다 결국 새장에 갇힌 관상용으로 전락하고 말았는가 말이다. 나는  자리를 찾고 싶을 뿐이다. 나는 날고 싶지도 날개를 꿈꾸고 싶지도 않다. 다만 나는 나의 생김새가, 쓰임새가 아닌 나의 생김새가 궁금할 뿐이다. 그러기 위해선 역시나 일을 해야 한다. 인간은 어찌 됐건 우선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알기 위해서 혹은 살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시도해보아야 하는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소진하지 않는 일이다. 찾기 전에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서이다. 사그라트려 버리기는 역시 싫은 것이다. 그래, 참을 수 없는 것이다(‘소진시키다’를 요새 말로 하면 ‘갈아 넣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언제 본인 스스로가 소진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까. 내 나이 서른도 안됐다(이제 넘었다). 그렇지만, 나는 이 질문에 답을 찾으려고 한다. 나는 던졌다—과정과 목적이 상충할 때 그런 느낌이 든다고.  세상에 많은 일들이, 직업들이 있지만 그 일의 과정과 목적이 서로 잘 맞아 들어가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예를 들어, 우리가 일을 하는 이유는 돈을 위해서다. 일을 하고 싶어서 일을 하는 사람은 극소수일 것이다. 우리는 일을 하는 과정에서 일을 해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하고, 우리가 일을 해야만 하는 목적(돈)으로부터 일을 해야 하는 이유를 찾는다고 볼 수 있다. 때로는 그 목적을 위해 이 과정의 불편부당함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고 뭣도 모르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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