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으로 나는 이틀을 좋아한다
내가 숫자를 하나 또 하나 세게 될 때는 할머니 집에서 어머니가 돌아올 날을 헤아릴 때, 이름하여 열 밤, 또 고모엄마집에서 산타를 기다릴 때의 백 밤이었다. 사나흘은 너무나 가깝게 여겨져, 워낙 가까워 그 말이 거짓일까 차마 셀 필요를 못 느꼈고, 또 육십 하고도 칠일은 너무 구체적이라 지독히 구체적이라 셀 수가 없었다. 그 구체성이 어린 내게는 공포스럽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열 밤은, 곧 사나흘이 후딱 지나면 다시 열 밤으로 다가와서는 내게 아직 열 밤이 오지 않았다고 속삭이는 그런 숫자였다. 아이에게 기다릴 수 있는 용기를 가져다주는 그런 감당할 수 있는 숫자였던 것이다. 나는 열 밤 따윈 그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는, 그런 용기 있는 아이이자 곧 어른이 될 아이였기 때문이다. 동시에 백 밤은, 내가 차마 셀 수 없었던 백 밤은 내게는 미지의 숫자로 다가왔다. 저 쥐어짠 용기의 반댓편에서 불어오는 용의 숨결과도 같은 숫자였다. 나에게 백 밤은, 그 자리에 못 박혀있으면서 오직 내가 다가가야지만 다다를 수 있는 그런 거리를 지녔던 것이다. 열 밤과 백 밤은, 다가서는 한 걸음이자 그 걸음을 딛게 만드는 용기, 그리고 그 용기만이 지탱할 수 있는 모험이자 시험이었다. 백 밤을 세려고 무던히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던 나날들이 모여 천밤의 백 밤을 이루어내는 유년의 끝은 저마다 할당된 숫자만큼만 셀 수 있는 아이라는 지위의 고용상의 불안정성을 통해 우리에게 사회를 미리 경험하게 해 주었다.
나도 모르는 새 나는 어른이 되어서는 열 밤의 숫자에 대해 가증스러운 마음을 품게 되었다. 십일은 숫자 7로 나눠지는 숫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십일은, 그 수를 곱해 숫자 365도 만들어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십일은 애매한 숫자다. 십일을 기다리는 것은, 내게 십일을 기다리게 만드는 것은 늘 갑자기 생겨난 약속에서, 아닌 밤중에 홍두깨로, 나를 괴롭히는 사회로부터의 출석명령과 같은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여전히 용기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보통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하는 사람이 강대한 이를 잠깐 마주 보기 위해서는, 그것이 거짓말을 위한 만남이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의 용기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백 밤은 어떠한가? 백 밤은 지독한 숫자다. 괴로운 숫자다. 백 밤은 내가 다가가는 날이 아니라 늘 내게 다가오는 숫자이다. 백 밤을 보내면 빚이 5,000,000원씩 쌓이는 경험을 지속해온 나는 그렇게 백 밤을 거꾸로 세왔다. 백 밤은 그 자체로 '뒤로부터-세는-숫자'이기 때문이다. 내가 다가가기도 싫은 것이 늘 내게 다가오는 그런 공포를 느끼게 만드는 엄습하는 숫자가 백이다. D-100은 ROK-30에게는 기계 제국의 숫자다. 그의 모험은 끝이 났지만 어찌 됐건 시험은 계속된다. 어쩌면 시험은, 내가 용기를 쥐어짜내어 세어 나아갔던 나의 시험은, 앞으로 다가올 시험이, 곧 다가올 시험이 나에 대한 시험으로서 그 적격 판정 여부를 따지는 시험이었을 수 있겠다. 내가 시험을 칠 자격이 있는지에 대한 시험으로서 말이다.
그래서 나는 열 밤 대신 칠일이 좋다. 칠일 대신 오늘이 좋다. 오늘만큼 내일이 좋다. 오늘은 토요일이고 내일은 일요일이다. 칠일 뒤엔 다시 토요일이 온다. 그래서 나는 오늘이 좋다. 그러나 나는 월요일, 화요일 다음에 수요일이 찾아올 때 조금은 슬프고 조금은 기쁘다. 이틀이 지나갔지만 시발 아직 사흘이 남았기 때문이다. 사흘은 괴로운 숫자다. 그러나 수요일이 지나면 시발 이틀밖에 안 남는다. 이틀만 버티면 된다. 이 때문이다. 나는 이틀이 좋다. 이틀씩 세는 게 좋다. 사나흘은 너무너무 멀다. 사나흘은 황금연휴와 같이 멀다. 내게 황금처럼 멀다. 연휴는 내게 휴식처럼 멀다. 내게 먼 것은 내게 먼 것이다. 나는 사나흘을 셀 빠에 이틀씩 세 번을 세고 나머지 하루를 다시 삼등분하여 아침 교통사고 사망 방지 반차, 점심 자살방지 반차, 저녁 과로사방지 반차로 살아남을 것이다. 누가 사나흘 황금연휴를 말하는가. 사나흘은 셀 수 없는, 얼마나-더-쉴 거야, 영원히-쉴래, 휴식시간은-얼마나-필요해, 영원히-쉴래, 셀 수가 없는 명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