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네트워크,서비스
한 소설가가 소설을 썼다. 스피드 있게 써 내려갔다. 현실에서 일어난 일, 그중에서도 소설가 자신과 그 주변인의 카카오톡 메시지를 그대로 옮겨내었던 일이 그에게 마치 그 직업에 고유한 일인 것처럼 말이다. 그에게 소설은 옮기는 일일뿐더러 있는 그대로를 옮기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를 통해 소설은 써졌고, 있는 그대로가 옮겨졌다. 따라서 우리가 소설에서 본 사건은 한 때 일어났던 사건이다. 동시에 그것은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기도 하며 그가 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이 일에 대해 소설 외적으로 접근할 생각은 없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내가 이러한 일에 대해 적의를 느낄 수 없기 때문이며, 또한 적의를 느낄 수 없는 이유는 이것이 바로 소설가의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소설을 쓰는 일에 내부로 다가가 이 혼동을 바로 잡고 싶다. 혼동은 한국어에서 혼용되어 쓰이는 사건과 일의 관계에 있다. 있는 그대로 옮긴다고 했을 때, 그가 실수한 것은 없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옮긴다고 했을 때 그가 실수한 것은 이 일이라는 말 자체에서 비롯되는 혼동에서 찾아질 수 있다. 즉, 이는 오직 있는 그대로의 질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실수는 없고 다만 실패만이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는 너무나 있는 그대로 옮김으로써 그가 있는 그대로 옮기고자 한 것에는 다다르지 못한 채 실패하고 말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있는 그대로는, 세계에, 있는 그대로 그렇게 그대로는 있지 않기 때문이다.
소설가는 허락받고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다. 더군다나, 허락받지 않으면 쓸 수 없는 영역에 대하여 바로 그는 허락을 바라지 않음으로써 독자의 허락을 받는다고도 볼 수 있으므로 허락받기는 소설가의 일에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다. 세계의 소설이 세계에 대하여 그러하듯이, 이를테면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는 가부장사회에 대하여 그것의 허락을 구하지 않는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채식주의자』는 그것이 가장 거부되어야 하는 곳에서 거부되지 못한다. 소설은 세계에 대하여 그 위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의 위력은 남성에, 한국에, 국가에, 일반성에 대하여 정확히 마주서 있다. 직진해오는 남성에 마주서본 이, 국가가 제시한 방향에 마주서본 이, 거부할 수 없는 위력을 단 한 번이라도 경험해본 이는 그러한 조화로움에 들어있는 역동하는 반감과 긴장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다. 소설가의 일이란 이를테면 절대음감으로 반감을 의식하는 일, 팽팽히 당겨진 줄을 뜯어 ‘그것으로 무엇을 어떻게든 아름답게 만드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 의식된 반감과 긴장은 있는 그대로(즉자적으로) 사건에 고유하지 않다. 반감과 긴장은 사건을 이루는 사람에 대해서 그것의 고유한 성질을 내비친다. 따라서 있는 그대로 옮겨진 긴장관계는 음의 하모니를 이룰 수 없다. 소설가의 일은 이러한 반감과 긴장을 구조화시키는 작업을 통해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소설가는 있는 그대로의 조화에 대해 구조적인 반감을 형성하고, 조화를 긴장관계로서의 조화로 재산출하는 일을 한다. 하모니를 부서트림으로써 새로운 하모니를 산출하는 일, 그것이 소설이 사회에 대해 그것의 위력을 울리는 불협화음적 요소이다.
우리에게는 달리 표현할 수 없는 불편함을 안기는 소설들이 있다. 계속해서 나는 말할 수밖에 없다. 『채식주의자』는 불편한 소설이라고. 건조한 메아리가 슬픈 산을 넘길 바란다. 아무쪼록 독서가 인간에게 기술적으로 요구되는 사회에서 이 글을 읽는 사람과 내가 공유한 것이 그러한 능력으로서의 하드웨어적인 측면이라는 점은 나에게 같은 소설을 반복해서 언급하는 변명이 되어주지만, 이는 또한 나의 슬픔이기도 하다. 마주서는 것은 조화로운 상태에서 부정함으로써 조화에 대해 조화의 조화를 이룬다. 조화에 들어있는 긴장을 결과로서 거부하는, 반감들의 조직화된 조화로서 불협화음이 조화의 새 가능성을 제시한다. 반복의 권력, 곧 동일한 것을 영구히 반복시키는 힘은 인간의 청각에 열려 있지 않다. 그것은 가능성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열어야 하는 성질의 것이다. 들리는 것과 듣는 것은 다르다. 그것을 듣기 위해서는 마주서야하고 마주선 자는, 평행하게 걷던 두 사람이 비스듬하게 만나는 광경에서처럼, 듣게 되는 것이다. —한 사람은 다른 한 사람이 울고 있는 것을 보았고 고민했으며 그렇게 그에게 다가갔다. 바로 이처럼 소설가는 글을 통해 폭력에 정향한다. 정향된 글이 갖는 위력은 두려움을 야기하는 힘이다. 두려움은 조화가 부숴질 가능성으로부터 야기되는 두려움이다. 두려움은 위력을 알리고 있다. 북을 때리는 북채가 아니라 때린 북이 울리는 관계들에 의하여 북재비가 소리에 휘감기듯이 바로 그렇게 위력이 폭력을 감싸 안는다. 북재비는 울려진 자신의 북소리에 경외감을 느낀다. 허락받지 않는 글쓰기와 허락받을 수 없는 글쓰기는, 이 구분은 또한 위의 혼동을 구분시켜주며, 절대 허락해주지 않는 글쓰기의 영역에서 그 시비가 가려진다. 금지를 알리는 표목이 경계를 넘어서려는 사람이 저지를 죄를 미리 알리고 있다.
넘어서려는 자에 의해 푯말이 쓰러지는 것이 아니듯, 울리는 관계들에 의하여 폭력이 와해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렇게 그 자리에 계속해 서있을 것이다. 미리 알려진 죄처럼, 우리는 그것이 서 있는 이유를 물을 수가 없다. 넘어서는 자는 허락받지 않았다. 그것을 구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위의 소설가는 허락을 따로 구하지 않아도 되는 바로 그러한 영역에서, 정말 허락을 구하지 않음으로써 있는 그대로를 옮겨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영역에서 있는 그대로는 있는 그대로이면서 있는 그대로가 아니게 된 것이다. 나는 이것을 실패, 곧 패배는 아닌 것으로서의 실패로 본다. 그러나 방향에 있어서의 착각, 곧 왜곡은 아닌 것으로서의 착각이 이러한 실패를 영역의 패배로 만들어 버린 것이 문제이다. 이름하여 소설가 협회는 소설쓴다는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고 한다. 영역의 실패는 이렇듯 소설가들의 집단적 착각과 맞물려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의 소설은 방향에 있어서의 지독한 왜곡을, 즉 소설은, 소설이 거짓말이라는 말을 못 참는 소설가에게 소설이 될 바에 차라지 있는 그대로의 거짓말이 되어버리는 것이 낫겠다는 푸념을 거짓이라고 하지 못하게 하는 왜곡을 저질렀다. 소설가 협회의 존재의의는 그들이 노동자인 한해서 유효하게 근거 세워질 수 있다. 이들의 노동이 사회적인 노동이라는 한해서 그러하다. 사회적 노동자로서 소설가가 권력에게 요구할 수 있는 권리는, 그것이 단지 말조심하라는 말일지라도, 사회가 노동자에 강제적으로 떠맡게하는 책임과 관계한다. 사회가 노동자에게 무한한 책임을 전가할 때, 소설가는 사회에 대해 정확히 같은 무게로, 그러한 압박에 의하여 그저 살려달라는 말밖에 할 수 없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나는 당장 그렇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살려달라. 사회적인 노동자라는 점에서, 이들은 사회에 대해 정당한 권리를 요구할 수 있다. 살려달라.
정당성은 그러나 사회에 의해서 부정당한다는 의미에서 정당화된다. 마주서려는 자에 대해 그 아무도 허락해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에는 정당화되는 노동들이 있다. 예를 들어, 이윤극대화의 모델구성, 시세차익의 계획수립, 학벌과 재벌에 공통적인 지위의 승계작업 등이 그것이다. 이들의 노동은 정당화되고 또 사회적으로 반노동적인 성격을 취한다는 데에서 정당화되는 것의 부정함을 알 수 있다.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대조를 이루는 그림에 찡그린 얼굴을 한 사람들에게, 반감과 긴장은 조화에 고유하지 않고, 조화에 강제된 사람들에 고유하다. 부동산업자 협회의 존재에 대해서 나는 들은 바가 없다. 그것은 대기업 임원 협회가 없다고 여겨지는 이유와 동일한 의미에서 들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즉, 있다고 여겨져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을 대변하는 이들은 다른 모습으로 이미 존재한다. 그들의 존재의의는 따로 묻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묻지 않아도 될 만큼 이미 유효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소설가 협회는 지금 존재의의에 대하여 이렇게 아우성을 치고 있다. 나는 마찬가지로 이들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들도 소설가 협회는 존재의의를 계속해 추구해 나가야하는 집단인 것을 스스로 알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협회를 하나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사교육협회는, 전교조만큼이나 불필요하다고 ‘여겨지고’ 있으나, 이미 현실에 단체로서 운동하고 있는 전교조와 한 쌍을 이루며 존재한다. 이들은 계속해 존재의의를 말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집단들이다. 보여지는 것은 보여지지 않는 것에 대하여, 은폐된 것은 노출된 것들의 배경으로 전체를 이루면서, 아우성치고 있는 모습이다. 이들은 모두 사회와 조화를 이루지 못해 벌벌 떨고 있다. 소설쓰기와 법무부장관의 관계는, 지금 한국사회에서 소설과 사회가 이루는 관계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넘어서려는 자는 이미 넘어선 자다. 그 앞에 남아선 자들은, 푯말 앞에서, 어떤 경계 앞에서, 철책 앞에서, 푯말에 대고, 경계에 대고, 철책에 대고 투정을 부리고 있다. 법적으로 보호받고 있지 못 한 현실의 소수자들, 약자들, 여성들, 아이들, 불법자들에 대하여 뒤따르는 것으로서 소설이, 앞서 나가지 못 한 채, 허락을 구하고—허락을 구해야만 하는 영역인 바로 그 법의 영역에서—때로는 소설가의 앞에 놓여있는 부정한 것들에, 때로는 아부하고, 그 성질을 뒤따라 이어받아 허락을 구해야 할 이들에 대해 도리어 허락을 구하지 않고 옮겨 적어버리는 행위를 지금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