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으로 둘러 쌓인 서울에서 보내는 편지
대구의 한 진보단체에서 노동하게 되기까지 학생은 여러 사건을 돌파해왔다. 보수적인 정치지형이라 일컬어지고 있는 대구에서도 진보는 필요한 동력으로 이해되고 있기 때문에, 그는 진보적인 노동자가 될 수 있었다. 진형과 지형 모두 그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진형은 일그러져있다. 진형은, 바로 그 지형에 의해, 진이 펼쳐진 굽이친 바로 그 지형에 따라 인력과 자원이 적절하게 배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진보단체에서 노동하는 활동가는 진보 진형이 가리키는 곳에 그 자리를 배치받았으며, 그 자리들은 길게 늘어진 띠를 이루고 있다. 진보 모두가 함께 순찰활동을 벌이는 산등성이에 이 띠가 둘러져 있다. 바로 이 산등성이에서 도시인은 모르는 진지공사가 벌어진다. 깊게 호가 파이고, 구덩이와 구덩이 사이에는 도랑이 이어진다. 곧 구덩이에 사람이 들어찬다. 그곳에 사람을 세워 둔 사람은, 산봉우리를 말한다. 산봉우리는 지켜져야 할 우리의 영토라는 것이다. 특히, 이 산은 전략적 요충지라는 것이 말의 골자이다. 산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산을 지키는 와중에 나무 몇 그루쯤은 베어져도 괜찮은 것은 산주의 입장이다. 그러나 사람이 구덩이와 고랑을 가득 채워 그것을 모두 메꾸게 될 때까지 사람을 죽어나가게 만드는 것은 산주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 이념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결정으로부터 시작된다. 그와 반대로, 산불을 막고, 산불이 번지는 것을 막고, 산사태를 예의주시하고, 병충해를 돌보아야 하는 일은 어디까지나 사람의 일이라는 점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그 일은, 산주의 입장에서만 견지할 수 있는 입장에서가 아니라 그러한 결과로써 고통받는 자들의 입장에서 끝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곧 떠넘겨질 일이다. 어쩌면 결과적으로 이 일은 산주의 입장과는 상관없는 일일 수 있겠다. 나는 재해를 책임지는 주인에 대해서는 익히 들은 바가 없기 때문이다. 한쪽에서는 이념이 사람으로 하여금 구멍을 메워나가게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고통받는 사람들이 고통받지 않기 위해 고통과 함께 그에게 고통을 가져다 줄 구멍을 판다. 어떤 노예들은 자신의 무덤이 아니라 주인의 무덤을 파는 것에 일생을 바치다 그곳에서 죽은 주인과 함께 묻힌다고 들었다. 오늘날은 상황이 나아져 자기 무덤은 자기가 파게 된 것이다. 우리는 취미 삼아 산에 오르는 길 중간중간에, 한때 전쟁이 벌어졌던 곳과 꼭 마찬가지로,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곳에서도 이러한 구덩이들을 발견하곤 한다. 발견된 구덩이들이 아직 메꿔지지 않았기에 발견될 수 있었던 바로 그러한 구덩이라는 점에서 아직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을 알아채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구덩이 안에 사람이 아직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까지 한 사람이 겪어내야 할 시련이란, 취미가 더 이상 취미일 수 없게 되는 시점에 놓여있다. 취미로 산에 오르는 사람은 도시에서 벗어나고자 시도한 사람이다. 도시에서 벗어난 직후, 산에서 바라보게 된 도시의 풍경이 아름다운만큼 그는 그렇게 산에 묶이게 된다. 그 도시를 향해 육박하는 사태가 산에 올라탄 나의 무게가 실린 발자국에 의하여 일어난 것이라는 점에서, 내가 산에 가져간 불씨 때문이라는 점에서, 내가 풀어놓은 병충해라는 점에서, 도시는 아름다울 수 있다. 그러나 도시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로 인해 아름답다는 것을, 곧 구덩이를 마저 채우게 될 고통받는 자는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지켜지지 않아도 되는 산은 완전하게 된 산이다. 이러한 산들이 산맥을 이루며 겹겹이 도시를 둘러치고 있는 모습에서 다시 누군가가 용기를 내 산에 오르려는 이미지를 떠올려 볼 수 있다. 이제 사람들은 취미 삼아 등산한다. 완전한 산에서 언젠가 사람들은 안전하게 정상에 오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