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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래로 Aug 14. 2020

'이세계異世界'와 좀비 세계와 바로 이 세계

사람이 삶을 살지 않는 것에 관해

‘이세계’에 눈을 뜬 현대인은 의아하다.


새가 왜 날지 못하냐는 식으로 말이다. 새가 왜 눈도 뜨지 못하고 있냐는 식으로 말이다. 막 알을 깨고 나온 새는 눈을 뜨지 못하고 있다. 눈을 뜨기까지의 과정은 언젠가 둥지로부터 뛰어내릴지 모르는 충동에 이르는 개관의 오리엔테이션이다. 새는 눈을 감은 채, 알에서, 알을 깨며 세계로 기어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이세계’로 넘어온 ‘이세계인’은 분주하게 주변을 살핀다. 그는 곧바로 둥지 밖으로 뛰어내리려 한다. 아니, 알 안으로 다시 뛰어들고자 한다. 탯줄이 있었던 자리인 배꼽을 문지르며 아이가 어떤 증거를 찾아 구하듯, 중간과정을 생략한 채 바로 그 자리에서 결정적인 증거를 찾으려 엄마 뱃속으로 되돌아가려 시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통용되어온 사고 습관과 가치관, 주관과 객관이라는 세계관의 차이 따위가 아닌 지극히 사소한 것이 그러한 시도를 좌절시킨다. 차이 자체가 놀라운 것이 아니듯, 놀라운 것은 세계의 놀라움이 아니다. 세계는 놀라울 만큼 거창하지 놀랍도록 거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정에서의 놀라움은, 즉 나도 모르게 놀라는 의식하지 못하는 놀라움은 언제나 뒤늦게 발견되는 놀라움이다. 그는 놀라워하지 않고 다만 의아해한다. 다시 말해 ‘이세계인’의 놀라움은-놀라움을 표현하는 그의 몸짓이 과장될수록 다음에 가까워진다-진정으로 사소한 것을 표현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다시 말해, 그는 사소한 것에 대해 멸시를 감추려 놀랍도록 거추장스러운 몸짓과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다. 그가 마주해 계속해 의아해하는 것은 이토록 아주 사소한 것이다. 이를테면, 있어야 하는 것, 혹은 있었던 것이 이곳에 없다는 식이다. 직선적인 것의 결여, 곧 과학적인 것의 결여, 과학적인 방법론의 결여가 바로 그것이다. ‘이세계인’의 배꼽은 그 자신을 자신의 세계와 연결시키지 못한다. 그는 바로 이것을 의아해한다. ‘이세계’에는 배꼽이 없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는 알을 살핀다. 알에서 나온 것들을 살피며  의아해하기 시작한다. 그러한 모든 중간과정을 의아해하기 시작한다. 없다는 것이 증거가 될 수 있을 때는 그것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의심을 품고 있을 때뿐이듯 말이다.


장르문학은 규칙들에 의해 세워진 플롯을 좇으나 규칙들의 규준이 되는 형식 법칙에 의하여 매도당한다. 장르문학이 모욕받는 문학의 현실은 전혀 낯설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이래로 조화와 대칭, 균형은 작품의 완결성을 그것의 완결성에 두는 성질이다. 그가 보기에, 인간에 내재한 모방 본능에 따라 대상을 완결성 있게 모방하기 위해서는 이 같은 조건을 따르는 것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악인의 행위를 모방함으로써 희극을, 선인의 행위를 모방함으로써 비극을, 비열한 자들에 대해선 풍자시를 짓는 것은 영역의 분리를 요구한다. 악인의 행위를 모방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행위에 대해 제약된 영역, 그러한 행위를 한계 짓는 구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의 행동은 진지해야 하며 행위의 전체 크기를 아우르는 범주는 한정되어 있어야 한다. 즉, 행동은 전체적으로 완결되어 있어야 한다. 오직 완결된 행동에서만이 예술가가 모방을 할 수 있는 행위의 대상성, 곧 모방의 범위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예술’에 들어서, 규칙들의 규준이 되는 이러한 분류와 나열의 형식 법칙은 조롱받는 입장에 처하고 말았다. 형식 법칙에 따라 분류되는 행위에 있어 중요한 것은, 오직 분류된 행위에 대한 전체적(보편적) 모방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예술가의 임무란, 곧 분류된 영역의 전체 행위의 개연성과 보편성을 논리적인 인과 법칙에 따라 도출해내는 것이다. 즉, 필연성의 법칙에 따라 이야기(해당 영역)를 완결 짓는 것이다. 이러한 분류는 계속된다. 비극에 있어서는, 복잡한 비극과 단순한 비극, 성격비극, 파토스적 비극으로 비극이 분류된다. 규칙들의 규준이 되는 형식 법칙은, 규칙을 위해 규칙을 희생시키지 않는다. 분류기호가 기호를 위해 분류 대상을 희생시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어떻게든 도서관에 책들은 꽂혀있는 것이다. 이름하여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책이 되지 못한 것들에 대해 우리가 사서에게 기대할 수 있는 바는, 없는 것이다. 형식 법칙은 다만 규칙 외적인 것, 이름하여 현실을 탈락시킨다. 모든 개별적이고 구체적이고 특별한 것들, 논리에 부합하지 않는 것들과 함께 그러한 영역—이 영역은 수학이 마찬가지로 포기하는 영역이기도 하다—을 포기하는 것이다. 세계가 인간에게 강요하는 고통이 이러한 영역의 포기와 함께 형식 법칙에서 소거된다.


정치인들이 추구하는 정치인의 형상은 이러한 형식 법칙들에 의해 세워지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들은 그들의 형상이 이러한 법칙에 따라 구성되길 희망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이 배격해야 할 첫 번째 원리는 바로 규칙을 희생시키는 일이다. 그러나 규칙을 위해 규칙을 희생시키지 않는 과정 그 끝에 놓이게 될 것은, 오늘날 이러한 사정에 거꾸로 선 선두주자가 된 출판 문학의 영역이 보여주듯, 규칙들의 패배이다. 문학은 장르문학에 대해, 정치는 이름하여 희망에 가득 찬 장르 정치에 대해 패배하게 되는 수순을 밟게 되는 것이다. 국회의사장을 가로지르는 원피스를 바라보는 노쇠한 정신이 울리는 비명은 예견된 패배를 알리는 미리 지르는 죽음의 단말마이다. 장르를 위하여 플롯이 희생되는 예는, 장르문학에 있어서 하나의 규칙으로 발견되는 예이다. 장르문학은 장르를 위하여 규칙들, 이름하여 개연성, 논리적 인과성, 분류된 행위의 한정성 등을 버렸다. 특히, ‘이세계물’은 규칙들이 희생된 장르문학의 전범이다. ‘좀비물’도 그러하다. 그러나 버림으로써 오히려 얻어진 것이 있다. 그것은 손에 쥔 것이 역겹고 부패한 것일 때에 해당된다. 개연성과 논리적 인과성은 사라지는 듯 보이나, 비개연성과 비논리성이 이러한 장르의 새로운 규칙이기도 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 모든 규칙들을 버리고 얻어낸 이러한 반 규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규칙들의 규준이 되는 형식 법칙을, 그가 자신에게 던진 것과 마찬가지의 시선으로, 비웃고 있다. 너도 비개연적이며, 비논리적이지 않느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상대가 너무나 개연적이며 너무나 논리적이기 때문에 손에 쥔 것을 놓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지을 수 있는 웃음인 것이다.


아기새는 모든 것에 대해 놀라워하지 않는다. 아기새가 아니라 모든 것이 그의 탄생에 대해 놀라워한다. 알을 깨고 나온 것이 모든 것들의 관심을 사로잡는다. 모든 것은 아기새에 천천히 다가선다. 그가 의심하지 못하도록 조심스럽게, 죽음조차 조심스럽게, 살며시 확실하게 그를 감싸 안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굳은 의식은 아기새가 알을 깨는 과정, 눈을 뜨는 과정, 그 모든 과정이 못마땅하다. 의아해하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왜 바로 눈을 뜨지 않는 것이냐고, 알조차 불필요한 것은 아니냐고, 그는 그렇게 불편함을 내비친다. 그는 눈 뜬 채로 태어나서, 건너뛰기 한 삶, 중간과정을 생략한 완성품이다. 완성품의 라벨은 전 성분 표시제에 따라 갖가지 원료들을 함량에 따라 나열한다. 그러나 ‘이세계인’이 ‘이세계’에 적응하는 정도가 높아질수록, 일순 천칭이 반대편으로 기울어지는 것과 같이, 그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것은 이제까지의 삶을 이루는 과정의 무게이다. 기울어지는 순간, 그는 자신의 무게와 함께 반대편으로 올라선다. 바로 이 순간, 장르를 위해 규칙을 희생시킨 곳에서, 반 규칙의 규칙이, ‘뒤흔들어 놓는 것’, ‘낯설게 하는 것’, ‘이질적인 것’으로서 규칙으로 올라선다.  그러므로, 내게는 코로나와 같은 새로운 종류의 바이러스가 낯설다기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굳건히 지속시키는 규칙들이 낯설다. 내게 N번방과 같은 새로운 종류의 범죄가 낯설다기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같은 이유로 고통받고 있는, 여성이라는 이유에서 오는 고통 자체가 낯설다. 내게 국회의사당을 가로지르는 원피스가 낯설다기보다, 그것과 함께 창녀와 종업원의 복장이 언급되어야만 하는 이유, 그들의 존재를 다 함께 모욕해야만 하는 민주시민이 너무나 낯설다. 모든 것이 내게 새롭게 낯설다. 그리고 오직 이러한 낯선 감정만이 정신의 경화된 부분을 도려낼 수 있을 것이다. 오직 낯설게 해주는 것만이 살아있는 것을 굳어 죽게 만드는 사회에 대해 비판의 날을 벼린다.


<부산행>으로부터 이어져내려 오는 한국의 좀비 영화는 <킹덤>과 <반도>에 이르렀다. 좀비 영화의 작품성, 곧 작품의 완결성은 이제 전 세계에 수작으로 인정받는 수준에 이르게 된 것이다. 각각의 작품을 두고 보았을 때 드는 생각들이 있다. 저래서는 안 되지, 저런다고 되겠나, 저러다 죽겠다, 저러니 죽지, 일련의 반응들은 도식적이다. 이 도식에 따르면 좀비의 세계는 내게 별로 낯설지 않다. 그러나 이 도식적인 반응들이 각기의 캐릭터의 행위를 평가하고 품평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나라는 사람, 즉 감정이 있고 살아있는 사람의 도식적인 반응 자체를 문제시하게 한다. 좀비의 세계를 낯설어하지 않는 나는 내가 낯설다. 어디까지나 감정이 이입될 수 있는 대상은 캐릭터이다. 옳고 그름의 문제는 나중이다. 어디까지나 살고 죽는 것은 또한 캐릭터이다. 작품성에 대한 평가는 그다음인 것이다. 그러나 의문을 들게 하는 것은 감정이 있는 캐릭터의 인간성에 있지 않고 바로 이 반응들의 도식에 있다. 좀비 떼에 둘러 쌓인 캐릭터가 그 캐릭터의 고유한 캐릭터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들의 반응에 대고 왈가왈부하는 것에서 캐릭터가 세계 이전에 이미 결정되어 있음을 발견된다. 곧 그들의 반응양식이 우리의 반응양식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러한 반응양식을 그들에게서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에게서 발견하는 것이다. 규칙은 이렇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실험실의 생쥐처럼, 통제된 환경 속에서 특정하게 고안된 자극들에 따라 일으켜진 특별한 반응들이 통계적으로 처리되어 하나의 반응양식으로 범주화된다. 바로 이처럼, 하필 좀비가 등장하게 된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좀비에 대해 슬퍼하거나, 분노하거나, 두려움에 떨거나, 삶을 포기하거나, 삶을 붙잡는 등의 반응을 보인다. 아직 살아있으며 그러므로 감정을 가져야만 하는 캐릭터가 보여야만 하는 이러한 좀비에 대한 다양한 반응들은, 좀비의 세계라는 실험실에서 이미 양식으로 된 반응으로 이해된다. 그렇다, 양식에 관해 강조되어야 할 지점은 감정이입에 있다기보다는 차라리 이해가능성에 놓여있다. 우리가 캐릭터에 대해 내비치는 감정은 캐릭터에 대한 우리의 이해의 정도에 전적으로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반응양식의 각기의 범주가 각각의 캐릭터로 자리 잡는다. 그러므로 우리의 감정이입 대상이 되는 캐릭터는 살아있는 것을 향해 던져진 정신이 아니라 죽어있는 것을 향해 발버둥 치는 산자의 몸부림에 가깝다. 우리가 감정 이입하는 대상은 언제나 살아있는 쪽에 있다. 그리고 캐릭터는 그 자체로 살아있지 않다. 극속에서 캐릭터가 보이는 좀비에 대한 감정의 비춤도, 한 사람이 낯선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향해 발작하듯 빛을 비추는 반응처럼, 오직 살아있는 자를 매개로 해 투사된 빛이 죽어있는 것을 밝히며 되돌아오는 감정이 비춘 빛일 뿐이다. 오직 이러한 의미에서 캐릭터가 살아나며 빛을 뿜는다. 바로 우리가 비춘 빛이다. 우리는 좀비에 대하여 좀비를 대하는 사람에 대해 감정 이입한다. 아니, 감정이입은 없다. 그저 우리는 고통 속에서 이 세계를 살아갈 뿐이다, 그들처럼. 이 세계에서 희망을 말하는 것조차도 금기시된다. 그럼에도 나는 희망을 말하고 싶다.



좀비물은 '이세계물'의 안티테제이다. 좀비가 등장하는 세계는 ‘이 세계’가 아니다. 이 좀비의 세계에 이질적인 것들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세계인’의 관점에서 갖는 ‘이세계’와 이 세계에 대한 차이의 합으로서 이질성이 아닌, 단 하나의 보편적인 것을 오직 보편적인 것으로서 더욱 첨예화시킬 뿐이다. 보편적으로 보편화된 것은 다음과 같다. “인간이 삶을 살지 않는다.” 살아만 있는 인간과 죽은 채로 살아가는 인간의 삶은 이제 이 세계에서 보편적인 현상으로 되었다. 다시 말해, 삶을 살지 않는 인간이 보이는 모든 개별적인 특징들을 소거시키고 공통적인 것만을 추려내면 이러한 보편성을 도출해낼 수 있을 것이다. 보편성은 개별적이고 구체적이며 특별한 것들이 탈락된 세계의 잔여이다. 보편성의 명령 아래, 삶을 ‘살지 않는’ 인간들은 그렇게 살지 않는 것이 되고 만다. 반면에, 이세계물의 특징은 바로 이러한 ‘살지 않는’것에 보색을 표현하고 있다. 그곳에는 만물에 정신이 깃들어 있다. 바위가 살아 숨 쉬고, 나무가 말을 걸며, 온갖 정령들이 춤을 춘다. 심지어 죽은 것도 되살아날 수 있는 곳이 이곳이다. 이곳은 만유정신의 세계이다. 그러나 좀비가 창궐하는 세상에서 살아 있는 사람을 향해 육박해 들어오는 것은 그 끝을 모를 다수성이다. ‘이세계’의 보색은, 언제나 살아 있는 쪽을 소수로 표현한다. 이처럼 표현된 살아있는 것의 소수화는 우리에게 앞서 말한 보편성의 폭력과 소수의 소수화된 공포를 동시에 말하고 있다. 즉, 다수가 공포가 된다. 다수가 소수에게 돌격해 들어온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와 ‘이세계’, 그리고 좀비의 세계 사이에는 논리적 관계가 성립한다. 이를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이 세계에서는, 사람이 삶을 살지 않는다. ‘이세계’는 이 명제에 대해 이裏관계를 보인다. 사람이 아닌 것이 삶을 산다. 그리고 좀비의 세계는 대우 관계를 나타낸다. 즉 이 세계에서는, 삶을 살지 있지 않는 것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닌 것으로 직접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말장난과 같이 표현된 보편적으로 보편화된 보편성은 이와 같이 직접적으로 표현된 보편성, 즉 “사람이 삶을 살지 않는다”는 것에서 그 의미를 좇을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현실성은 이러한 명제와 역명제 사이에서 진동한다. 현실이 결코 논리의 사분면의 한 구석에 귀속되지 않음을 삶을 사는 인간은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좀비물의 현실성은 위와 마찬가지로 좀비는 (원래) 사람이라는 입장에서 오는 고통과 인간이 좀비보다 더 무섭다고 하는 이제는 널리 알려진 현실적인 공포 사이에서 진동하게 된다. 반면에, 이세계물은 사람이 아닌 것이 사람보다 더 사람답다는 것에서 오는 놀라움과 인간의 바닥 없는 비인간성에 대한 좌절 사이에서 진동하게 된다. 진동은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진동은 인간에게 오직 감내되어야 할 것으로서 진동하기 때문이다. 진동하는 세계의 부정과 부정의 부정 사이에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모든 인간은 고통과 공포, 놀라움과 좌절, 그러나 고통과 희망 사이에서 진동하며 끝내 삶을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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