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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래로 Sep 10. 2020

백래시라고 부르기엔 모자라고

백래쉬가 아니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거대한


사회・정치・제도적 변화로 인해 남성의 영향력과 권력이 줄어든다고 느끼는 불특정 다수가 강한 정서적 반응과 함께 변화에 반발하는 현상인 '백래시'는 오늘날 한국의 페미니즘을 가로막는 (남성)권력집단의 반발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82년생 김지영>을 읽는다는 것이 어쩌다 페미니스트 낙인이 되어버렸는가. 왜 "Girls can do anything"이 페미니스트 선언으로 읽히게 되었는가: 왜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남자들은 이렇게 광기를 드러내는 것인가? 왜 페미니즘은 선언으로서 공개되고, 드러내야만 하는 것으로서 허락을 요구받는가?



이는 페미니즘에 대한 원천적 차단으로, 그 호기심 자체를 문제시하는, 또한 그 이상의 자기 검열을 목표로 삼은 권력의 술수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권력은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검열은 실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페미니즘을 주의(ism)화한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이는 자유가 자유주의가 되는 것과 계몽이 계몽주의가 되는 것, 민주가 민주주의가 되는 것과 같은 목적에서, 어쩌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목적에서, 이루어졌다. 권력은 일단 구별 짓고 서서히 양자를 통일해 나간다. 이때 통일의 방향성, 어느 쪽으로의 적응인가에 대하여 널리 알려진 상식은 잘못됐다. 승자에게로 모든 것이 흡수되는 동시에 승자의 기준이 의해 어떤 것이 탈락하고 소멸해버리는 이미지는 이러한 오해를 가중시킨다. 이는 승자만이 남은 세상에서 승리의 이유를 좇는 학자의 직관에서 비롯됐을 것이 분명하다. 적응은 이런 식의 일방향 운동이 아니다. 오히려 승자는 패자의 부재에 적응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다. 그리고 이러한 적응이 결코 쉽지 않은 과정임을 역사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전승의 도취감은 순간이며 승리의 이미지는 곧바로 퇴색되어 간다. 즉, 승자는 승리를 지속시킬 수 없다. 오직 특정한 구조만이 이러한 가능성을 안고 있다. 이에 맞춰 승리는 패배에 적응한다. 승리와 패배가 구조화된다. 패자는 구조적으로 생산되는 승리의 잔여물이다. 승리가 계속되는 한, 오늘날의 승자는 한때 승리했던 자들의 전승 행렬에 참여했던 자인 동시에 그 전리품에 대고 환호성을 지른 경험으로부터 이전의 승리자들과 함께 하는 자이기도 하다. 그는 축복받은 자로서 승자와 함께 하는 승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승자가 취한 것은 , 패자에게서가 아닌, 한때 승리했던 자들이 그 이전의 승리자로부터 이어받은 길고 긴 전리품의 목록에 다름없다. 다시 말해, 적응은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일어나는 일방적 과정이 아닌 것이다. 적응은 양자 모두에게서 일어나며, 이는 반복의 힘을 동력으로 한다. 이 힘을 바탕으로 승자와 패자의 존재는 자연현상으로 추대되기까지 한다. 그렇게 사자가 동물의 왕이 되며, 또 사자에게서 승리한 사자가 한때의 승자가 되며, 반복되는 승리에 도처에 패배자들이 난무하게 되는 것이다. 사자마저도 사자에 대해 무한히 패배하기 때문이다. 자연현상으로 올라선 반복되는 승자와 패자의 구분은 너무 비자연적인 방식으로 자연을 재단함으로써 그 인위성이, 그 노골적인 의도가 노출되게 된다. "만물은 서로 돕는다.". 그러나 반복되는 것은 승자에서 승자로 이어지는 타락의 과정일 것이다. 이 과정에서 오늘 패배한 자는 그렇게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그는 더욱 강대해진 승자에 맞서 계속해 패배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적응은 반복되는 구조에서, 유기체가 놓인 환경과의 상호작용에서, 산다는 것 자체에서 일어난다. 적응은 곧 구조에의 적응이다. 사는 것은 적응하는 것이다.


계몽의 한창에서 장 자크 루소는 '계몽에 반하는' 계몽주의자로 여겨졌다. 반계몽주의적 계몽주의자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사회 속에서 쇠사슬에 묶여 있다"함으로써 인간 본성을 왜곡시키며 강제하는 사회를 비판했으나, 이런 그의 언명에 위대한 계몽주의자인 볼테르는 차라리 자연으로 돌아가 네발로 숲 속을 기어 다니라고 화답했다. 볼테르가 생각하기에 계몽에서도 사회비판에서도 그 방식으로 제시되어야 하는 것은 선명함, 곧 계몽(비판) 행위의 주체와 대상의 선명한 구별이기 때문이었다. 어떤 이는 계도되어야 할 대상인 동시에 그런 그들을 이끌 사람은 주체로 우뚝 서게 된다. 그러나 계몽되어야 할 대상에는 바로 이러한 계몽의 요구도 포함된다는 루소는, 모든 계몽주의자들이 계몽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인민에 대한 불신을 드러내는데 거리낌이 없었던 바로 그 순간, 인민 일반에 대한 믿음을 견지함으로써 조롱받았던 것이다. '깨어나라'는 명령인 그 계몽조차도 다시금 계몽되어야 한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이것이 바로 적응의 위험성을 강조하는 이유이다. 또한 승리의 타락 과정을 경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유주의를 교육하는 현장에 교육의 대상이 되는 이에게 별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것, 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해야 한다는 것, 미리 결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그가 최종 결정권을 양도받았다는 사실, 즉 그가 전혀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일은 이제 듣는 이와 말하는 이 모두에게 피곤함을 불러일으킨다. 민주주의 또한 마찬가지다. 이것은 모든 것이 구조에 적응해버리고 만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한때, 한 사람을 자유주의자로 부르는 것은, 오늘날 누군가를 빨갱이로 부르는 것과 같은 차원에서, 멸시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민주주의는 어떠한가? 앞서 보았듯, 민주주의자 역시 조롱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승리한 이념으로서의 이러한 이념들에게서 우리가 여전히 멸시의 잔재들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여전한 것은 곧 적응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여전한 와중에 멸시의 뜻은 화석처럼 굳어버렸고 화석이 발하는 과거의 신비스러움만을 간직한 채 농담으로 사용된다. 대학교에서 그리고 대기업에서, 박 과장은 완전 민주주의자야 혹은 최대리는 완전 자유주의자야, 김 교수는 완전 계몽주의자야 하는 것에서 자신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것은 농담 아래 진의를 숨기려는 사람의 의도라기보다 오히려 적확히 의미를 전달하는 말의 놀라운 구조적 적응이다. 그 이유는 회사와 학교에서 자유와 민주 그리고 계몽은 굳이 입 밖으로 꺼내서는 안 될 말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페미니즘의 운명도 이와 같다. 어느 한 때, 이 군은 완전 페미니스트야 하는 말이 질 나쁜 농담으로 통용되는 이때에 화석이 되어버린 것은, 적응하지 못 한채 도태된 것은 아닌 것으로서, 지금 이 순간 살아있는 것을 이루고 있는 골자이다. 이천 년 전 어느 한 양치기가 증명했던 것처럼 사람은 신 앞에 평등하다는 말은 옆구리에 창을 박아 넣기에 충분했고, 사백 년 전 어느 한 귀족이 신이 되어버린 사제 앞에 도리어 신이 없음을 말하며 산화한 것처럼, 오늘날 화석으로 발견되는 것은 그때 그 순간 살아있는 것을 이루는 뼛조각임을 말해주고 있다.


당연해질 것이 당연해지는 과정에서 권력은 그 길목에 서서 권력의 경제성을 산출하는데 도움이 되는 어떠한 요소를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듯하다. 권력은 풀린 밧줄이 스스로 내가 지금 자유로워졌음을 선언하고, 이 순간 한 사람을 구속하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그 스스로 드러내기를 원한다. 따라서 그러한 소원이 성취된다면야 언제든지 느슨한 것을 다시 옥죌 수 있을 것이라고, 즉 관리의 영역에서 벗어난 것을 다시 관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는 민주주의자야 하는 농담에서 알 수 있듯이, 완전히 실패했고, 또한 이는 페미니즘 운동의 동력이 되어주었다. 즉, 민주주의는 당연한 것이 되었고 페미니즘은 곧 당연한 것이 될 것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그러한 당연함 속에서 맞닥뜨린 당연하지 않은 상황에서 '민주주의자'는 때론 농담으로 쓰이게 될 것이며, 동시에 『82년생 김지영 』을 읽는 것 자체가 곧 페미니스트 인증으로 되어 논란거리가 되는 상황에서는 이러한 상황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으로 인식되며, 정말 징후적인 상황(사태)이 되어버림으로써 페미니즘이 곧 당연하게 될 계기를 마련해주는 것이다. 이는 곧 "백래시는 반드시 실패한다"와 같이 축약된다. 그러나 내가 걱정하고 있는 것은 페미니즘-백래시-페미니즘(반격)으로 이어지는 이러한 도식에서 드러나는 간명성 그 자체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의 걱정은 당연하게 되었다고 생각한 민주주의가 모든 자유주의와 계몽주의 등과 함께 그 완성에 다다르지 못한 채 실패했으며(적어도 그렇게 당연한 것만은 아닌 것으로서 여겨지며), 이러한 민주주의의 미완성이(혹은 실패가) 페미니즘의 동력이 된 것 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는 페미니즘을 앞선 모든 실패를 재복구하려는 시도로서 이해하고 있다. 그러므로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는, 앞선 언명과는 다르게, 결국에 실패하는 종류의 것으로 볼 수 없다. 완성에 이르지 못하는 모든 시도들은 그에 적대적인 반대편의 성공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위의 도식은 실패에 적응하는 것, 끝내 모든 실패들과 함께 실패로서 정착되는 것으로서 이해된다. 다시 말해, 『82년생 김지영 』이 논란이 되는 이유는, 앞선 모든 시도들의 총체적인 미완성 상태의 연관관계 내에서 한국 사회의 사회로서의 실패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한국 사회가 모든 것이 끝내 어떤 한 지점으로 수렴하는 일방통행의 과정, 그 과정의 종국에 위치해있기 때문이다. 경제성장제일주의가 바로 이 지점이다. 이는 곧 민주주의도 경제성장이며 자유주의도 경제성장이며 온갖 주의들도 결국 경제성장의 과정이나 혹은 경제성장 그 자체에 결부시켜 이해하는 것에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이 우리가 지금 적응해버린 사회인 동시에 우리가 적응을 강요당한 한국사회의 현주소이다.


실패할 운명의 백래시가 아닌 백래시는 지금의 한국사회에 적응하라는 명령으로부터 이어지는 일련의 형 집행과 같다. 앞선 모든 시도들이 최종적인 선고를 받지 못 한채 이 집행과정의 각 단계들을 밟고 있다. 일심재판, 이심재판, 다시 재판장에서 재판장으로. 그러므로 도식적으로 반복될 백래시를 종식시킬 유일한 방법은, 전과는 다른 것, 곧 구조적으로 새로운 것을 창출해내는 방법밖에 없다. 그러나 일명 "돈이 되는 페미니즘"은, '돈이 되는 민주주의', 곧 민주주의 국가가 더욱 번영한다는 오늘날의 상식과 '돈이 되는 자유주의', 곧 자유시장경제가 지고의 선이라는 주장을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개개인에게 페미니즘이 곧 지나게 될 터널을 미리 알려주는 표지판과 같다. 어쨌거나 돈이 되는 것으로서 적응해나가는 길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돈이 되는 페미니즘"에 대해서는 상반된 평가가 가능하다. 즉 어떤 이들은 욕으로써, 자조로써 이 말을 사용함으로써 스스로 중심에서 멀어지며, 안티 페미니즘의 모순을 드러낸다. 그들은 중심을 자처하기 때문이다. 또한 세상의 중심인 돈에게 예로써 사대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돈이 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곧 그것이 그만큼 보편적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여기서 슬픈 자기의 초상을 발견하게 된다. 보편성에 깃든 새로울 것 없음이라는 반복가능성은 반복되는 선거의 새로울 것 없음 만큼이나 현란한 슬픔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새롭게 보편적으로 되어 버린 것은 이제 문화산업에서 흥행공식으로 또 선진 문화의 문법으로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과정에서  항상 쌍으로 나타나는 낙후된 인식에 한숨을 쉬며 그조차도 새로울 것이 없다는 식으로 늘 새롭게 놀라곤 한다. 그들의 그러한 반응조차도 새롭지 않다. 계속해 놀랍게 유사한 반응들이 반복된다. 즉, 남성-권력은 여성의 자기 검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역정을 내고 마는 것이다. 그들은 상황 자체를 되돌아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검열의 강도를 높여, 검열이 검열로서 의미를 상실하는 지점을 훨씬 너머서까지 검열을 계속 이어나가는 것이다. SNS의 글귀, 특정한 액세서리, 티셔츠에 박힌 어떤 문구, 논란의 책 등을 소지했다는 사실만으로, 때로는 '좋아요'만으로 말이다. 이러한 상황은 희극적이나 반응과 예측 둘 사이의 일치는 비극적이다.


사회・정치・제도적 변화로 인해 남성의 영향력과 권력이 줄어든다고 느끼는 불특정 다수가 강한 정서적 반응과 함께 변화에 반발하는 현상인 '백래시'는 오늘날 한국의 페미니즘을 가로막는 (남성)권력집단의 반발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나는 우선 남성 집단의 조직적이고 구조적인 반발과 그러한 변화에 반발하는 개개인의 반동적인 모습을 (얼마든지 말할 수 있지만) 다음의 이미지와 대비시켜보고 싶다. 한국 법원은 손정우의 송환을 불허했다. N번방. 양진호. 셀 수 없음. 이들의 범죄행위는 이들의 범죄행위에 가담한 한국 남성의 범죄행위와 함께한다. 이들의 범죄행위는, 이에 앞서 발생한 모든 범죄행위를 단죄하지 못한 한국 사법부의 비호와 함께 한다. 범죄행위를 변호하는 대형 로펌들은 이들의 범죄행위에 함께 한다. 한국 사법부는 한국의 엘리트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은 한국사회를 함께 한다. 나는 이 모습에서 페미니즘에 반발한다거나 반동적인 면모를 찾았다기보다, 죽 그래 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라는 한국사회의 관성을 발견한다. 반발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페미니즘에 대한 한국 남성의 반발이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의 반발로서 말이다. 안희정, 오거돈, 박원순은 사회의 정점에 위치한 자들로서, 깊게 뿌리내린 한국 사회가 수십 년을 걸쳐 맺어낸 결실이다. 바로 그 과실을 우리가 마주함으로써 한국사회가 뿌리내린 이 토양이 과연 어떤 토양인지를 유추해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82년생 김지영』이 리트머스지로써 기능을 하는 지금의 상황에서 토양의 pH 농도를 마찬가지로 측정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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