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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래로 Sep 22. 2020

철 지난, 『스카이캐슬』을 보고

재탕한 커피도 여전히 향기로우며 카페인이 있는 법이다.

스카이캐슬 20화는 천하 역작의 화룡점정이었다.*


한국사회를 거의 완벽에 가깝게 묘사했다고, 특히 그중에서도 20화 막바지에 나타난 배운 것과 현실 간의 괴리 그리고 그 간극 사이에 인지부조화가, 식탁에 앉아 차를 마시는 장면에서 드러나는데 과연 백미였다. 


한국사회가 어떤 사회인가. 알려지지-않은-알려지지-않은 죽음이 있고, 알려지지 않은 죽음이 있고, 이제 알려진 첫 번째 죽음에서 은폐가 일어나는 사회이다. 그리고 두 번째 죽음이 있고, 세 번째 죽음이 있고, 이제 그 전염병이 사대문 안에 퍼져 임금님 귀에 들어가야 진상조사의 명을 받드는 사회 아니었던가.


오직 죽은 뒤로야, 그것이 서울대 학생의 죽음 정도는 되어야, 그 인지부조화를 깰 종이 한 번 울리는 것이다. 오직 불타 죽은 뒤에야, 그 재의 성분을 본격으로 조사해 과연 유해성분이 먼지 한 톨도 나오지 않아야, 재를 다시 단지에 담아 전당에 모실 수 있는 사회 아니었던가. 


오직 죽은 뒤에야,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죽은 뒤에야, 죽은 이를 밟고 나아가는 사회 아니었던가. ‘앞서서 나가니’ 그곳은 망각의 구렁텅이이고, ‘산 자여 따르라’ 앞으로 이끌려 갈 곳은 이어질 사건과 사고 사이의 나락일 터이다.


이제 죽음이 조롱받고, 과연 조명은 스쳐 지나가기까지 한다는 것을 혜나의 죽음을 통해 말해주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조명은 누굴 비추는가? 과연 깜깜한 바닥인가, 정상부의 모난 틈새인가. 아파트에 햇살이 훤히 비춘다.


*2019년 2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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