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요된 화해는 오늘날 화해가 이루어지는 보편적인 방식이다.
화해의 스펙트럼은 일차적으로 ‘폭력의 종식’에서 비폭력적 갈등상태, 갈등의 역동적 균형 상태, 시민적 우정의 관계를 지나 완전한 통합의 단계로 나아간다. 사회 집단의 동질성 연대로 이어지는 화해의 심화 경로가 우선의 만연한 폭력의 종식이라는 점에서, 폭력의 종식은 보다 실질적인 화해를 위한 예비 단계가 된다. 하지만 화해의 가장 첫 단계인 그러한 폭력의 종식이 압도적 폭력에 의한 폭력의 종식이라는 점에서 과연 진정한 폭력의 종식인가 하는 물음 그리고 폭력의 종식이라는 단계 자체가 도달 불가능한 상태에 있지 않은가 하는 물음을 던지고자 한다. 당장 화해의 스펙트럼 그 시작 지점에 위치한 ‘폭력의 종식’에 다가서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진정한’ 폭력의 종식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물어야 할 것이다.
폭력을 종식시키는 것은 다름 아닌 보다 ‘선명한’ 폭력이다. 선명한 것은 구획될 수 있고 관리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즉, 그 책임소재를 따져 물을 수 있게 된다. 선명한 폭력은, 그것이 행사된 영역에 흔적을 남길 것이고 흔적은 투명하게 공개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거대한 폭력, 곧 폭력의 독점 상태로 볼 수 있는 국가가 자행한 폭력은 이후 법적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게 된다. 다시 말해, 책임의 주체로서 고발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행정부가 국가를 대의함으로써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사과와 배상 및 사법살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사과와 배상이 이루어진다. 늦게나마 국가와 국가 권력이 자행한 폭력의 피해자 사이에 화해가 모색되는 것이다. 그러나 선명한 폭력이 꼭 선명한 자국을 남기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국가 권력은 미시화되었기 때문이다. 감시사회 혹은 자기감시사회로 일컬어지는 현대 사회에서 국가 권력이란 은폐된 수준에 이르렀으며, 그 책임소재 또한 불분명해졌다. 행위의 주체로서 국가는 더 이상 무대에 서지 않으며 국가의 하위 체계 혹은 각종 기구, 기업이 그 자리에 서게 된다. 그렇게 국가의 폭력은 사회의 폭력으로 변모하게 되는 것이다. 사회의 폭력은 꼭 폭력이라 정의 내릴 수 없는 그러한 각종 폭력의 집합체라 말할 수 있다. 여기에는 교육의 문제, 부의 양극화 문제 등이 포함된다. 이렇듯 선명하지 않은 폭력은 피를 피로 씻는 복수와 같다. 시작 지점은 더 이상 찾아질 수 없으며 폭력이 불러일으키는 연쇄적 효과에 의해 모두가 이러한 연관관계에 매몰돼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한’ 폭력의 종식은 사회의 합리화 과정에 직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다. 그 이유는 비합리적 사회가 곧 위의 문제들을 양산하는 사회와 같기 때문이다. 반면에 합리화된 사회는 미시화된 권력들과 분화된 권력 각기의 작동 방식 자체를 합리적으로 운용하는 사회이다. 예를 들어, 교육 현장에서는 교육 과정에 잠재적인 문화적(상징적) 폭력을 지양하는 것이고, 노동 현장에서는 노동 과정에 잠재적인 착취를 지양하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국가의 역할이 주요하다. 무력한 개별 인간과 그가 속한 집단 사이에 내재한 권력의 비대칭성으로 인해 일어나는 폭력에 대해 국가가 그 일차적 책임을 짐으로써만 이러한 갈등이 해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합리적인 사회의 합리적인 구축은 유토피아적인 전망이다. 합리적인 사회의 구축과 동일선상에 있는 ‘진정한’ 폭력의 종식 또한 이 전망에 포함된다. 따라서 스펙트럼의 최종 지점으로서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의 화해 상태인 동질성 연대는 유토피아의 유토피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화해는 단계 단계를 올라서는 방법을 따르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각 단계를 밟아 올라서지 않으며, 각 단계를 없애-가지는(지양하는) 것에서 추구되는 것이다. 화해에 이르기 위해서 그 중간 지점인 갈등의 역동적 균형 상태에 좌우로 나타난 긴장과 배려, 연대와 폭력의 지양이 동시에 필요하다. 스펙트럼 위 한쪽 끝에 위치한 ‘폭력의 종식’은 동시에 다른 끝인 ‘동질성 연대’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화해의 스펙트럼은 한 점으로 수렴된다. 이러한 이미지는 변증법적으로 구성된다. 즉, 분광 장치로서의 스펙트럼이 아니라 이 한 점에 이르기 위해 빛을 모으는 집광기로서의 스펙트럼이 화해의 스펙트럼이다.
예를 들어, 위안부-성노예 문제는 과거사 문제인 동시에 현대사 문제이기도 하다. 이는 과거 일본 제국주의, 군국주의의 직접적인 폭력에 의한 것이기도 하며 동시에 오늘날 이 문제를 두고 얽혀있는 집단들의 폭력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이는 시민의 연대 문제이기도 하며, 시민 사이의 반목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위안부-성노예 문제가 화해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 시도된 갖가지의 방식들은 ‘비가역적 합의’로 표현되기도 했고, 돈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이 모두가 피해자들에겐 계속되는 폭력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시된 이후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상황이 악화된 것은 결코 아니다. 여전한 위력과 앞선 모든 반목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리고 주목해야 할 지점은 이 과정이 사회 전체가 합리화되는 과정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어떠한 문제에 깃든 화해의 가능성은 모든 문제가 집약된 사회가 개인과 화해하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실마리이다. 혹은 가능성은 사회의 풀 수 없는 매듭을 향해 날아든 칼날이다. 우린 이 모두를 없애 가진 역사의 증인으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