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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래로 Sep 24. 2020

'촛불'에 대하여

『촛불 이후, K-민주주의와 문화정치』(천정환, 2020)를 읽고


『촛불 이후, K-민주주의와 문화정치』 의 1부 「 ‘촛불’의 문화와 대중정치」 는 촛불이 우리에게 던진 과제, 즉 촛불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해 개괄한다. 내보인다는 의미에서 1부의 제목이 책의 제목과 갖는 유사성에 주목해야 한다. 여기서 ‘촛불’은 K-민주주의의 K에 대한 기의이자 또 다른 차원의 의미를 가진 기표이기도 하다. 지금 이 순간 ‘촛불’의 문화가 K-정치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문자 K와 상(像) ‘촛불’ 아래에서 대중정치와 문화정치는 상동 기관임을 알 수 있다. 이어지는 2부(역사전쟁과 문화정치)와 3부(K-민주주의의 계급, 젠더, 세대) 제목 역시 마찬가지로 패러프레이즈된다. ‘촛불’은 역사전쟁의 그 역사를 이루는 사건이기도 하며 지금 전쟁 중인 역사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촛불’의 주체를 누구로 볼 것인가에 대한 논쟁, 곧 ‘촛불’의 행위자를 그가 세운 공에 따라 포상하는 작업이 뒤따르게 된다. 바로 이것이 문화정치이다. 문화정치는 무엇보다 구획하고 선별하고 장려하는 사업의 형태를 띠고 있다. 그 대상이 되는 것이 바로 대중이다. 그리고 이러한 구별짓기에서 밀려난 자들, 탈락한 자들, 언급조차 배제된 자들이 있다. 이들이 대중을 그 바깥에서 구성하는, 대중의 구성적 타자들이다. 이들은 대중정치가 기능하기 위해서 부어진 기름이며, 동시에 이 기능이 향하는 합법적 혐오 대상들이다.


책은 ‘촛불’에서 시작하여 <1987>로 끝이 난다. 이것은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지점이다. ‘촛불’은 아직 <영화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87년이 <1987>화 되었다는 것은, 그리고 각기의 역사적 시점들이 <응팔>, <국제시장>화 되었다는 지점에서, 우리에게 지나간 ‘사건’이 언제든지 특정 문화정치적 스펙트럼을 통과하여 굴절된 것으로서 지금 다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동시에 이것은 살아있는 경험으로서 ‘사건’이 물화되는 모습이기도 하다. 물화되는 과정은 곧 영화의 연출 및 편집 과정과 같다. 즉, 어떤 것들은 줄거리가 되어 선택되고 어떤 것들은 영화의 구성을 위해 빠져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감독은 영화에 대해, 영화산업은 감독에 대해, 자본은 영화 산업 전반에 대해, 문화정치의 구별짓기를 행사한다. 다시 말해, 극장에서 상영 중인 영화들의 총체, 그러한 총체를 구성하는 것이 문화정치다. 영화의 성공이 곧 동원된 관객수로 평가되면서 이제 영화가 영혼을 다해 관객을 끌어모으듯이 바로 그렇게 문화정치는 대중의 영혼을 끌어당긴다. 따라서 나는 책에 제시된 ‘촛불’에 대한 기존의 해석을 살펴보면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것이 지금 어떤 문화정치적 기능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우선, 1부를 중점으로 각 장들을 연결하여 ‘촛불’의 정치철학적 미학에 대해 생각해볼 것이다. 물론 그 역도 가능할 것이다. 그 주된 이유는 ‘촛불’이 미적으로(아름답다고)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그런 이유에서 ‘촛불’이 정치적으로 읽히고 있기 때문이다.  


‘촛불’을 말하기 이전에 ‘대중’이 무엇을 가리키는 용어인지 언급해야 할 것이다. ‘촛불’은 대중에 의한 시위이자 지배권력에 대한 저항이었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문화정치의 대상이 되는 ‘대중’이란 무엇인가? 스테판 욘손은 ‘대중’이 정치적 조직의 상처라고 말한다. 이 상처는 또한 이제는 굳어버린 흉이기도 하다. 대의민주주의 제도 안에서 거의 대부분의 정치적 조직들은 인민을 위한 정치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한 발자국만 더 가깝게 다가서면 이들이 말하는 인민이 곧 인민 전체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대의제의 정의에 걸맞게 이들 정치조직은 특정 계층의 이익을 혹은 그 자체의 필요성을 대변한다. 즉, 이들이 말한 전체 인민은 그들이 전체로 ‘선택한 인민’이다. 이러한 선택은, 정치적 조직이 그 자신을 포함한 존재들의 우선순위를 설정한 것의 결과로써 이루어진다. 이러한 과정은 곧 스스로를 상처 입히는 과정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들은 특히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물론 전체 인민도 중요하다. 하지만 모든 것이 중요하다는 말은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말과 같으므로 중요한 것은 특히 중요한 것으로 선택된 것이다. 나아가 그들은 인민을 선택함과 동시에 그 인민에 포함될 스스로를 인민과 구별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들은 어쨌거나 다른 집단들과의 구별을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집단에 그들이 선택한 인민도 포함된다. 그들은 두 번 선택한다. 그러므로 스스로 상처 입히지 않는 정치조직은 없다. 인민을 대변하면서 인민과 스스로를 구별할 때, 이들의 주장 ‘어떤 것이 중요하다’는 말속에는 언제나 ‘더’ 중요하다와 ‘항상’ 더 중요하다는 말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그들은 전체를, 전체 인민에 대한 언급을 놓지 못한다. 중요성과 우선성은 전체 안에서 성립 가능한 상대성이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전체는 선택될 수 없지만 정치조직에 의해 상대화 된 인민과 대중은 전체로서 선택될 수 있다. 이러한 괴리가 바로 정치조직이 입은 상처로서의 대중을 표현한다.


‘대중’은 정치적 조직의 상처다. 상처는 우리에게 인민이 통합된 주권이라는 자신의 이미지와 거의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정상적인 상황에서, 인민은 자신이 인민을 대표한다고 주장하여 정치 안에 포함되는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에 의해 대변되어 정치로부터 배제되는 사람들로 구별된다. 다시 말해, 그들은 어떻게든 매개자를 통해서 이미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배제될 수 있다는 것이다. 대중의 개념이 1789년 이후에 의미를 획득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다. ‘인민’과 관련된 의미의 스펙트럼에서, ‘대중’은 정치에서 배제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정당화로서 환기되어야 하는 다수를 의미하게 된다. ‘대중’은 그들의 배제로 인간의 도시를 세우는 인구의 일부이다. 그것은 ‘대중’이 정치 공동체로부터 배제된 사람들의 객관적인 호칭이 아니라는 사실에 뒤따르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폭력과 무질서, 야만적 본성의 환상을 그려 냄으로써, 그 용어 자체는 그것이 수행하는 배제를 정당화하는 동시에 배제의 메커니즘으로서 작동한다. (스테판 욘손, 『대중들』, 2장 「대중의 발명」, 167)


정치조직의 상처로서 대중은, 대중이 폭력과 무질서에 연계되는 이유를 말해준다. 대중은 그 정의상 정치집단의 수만큼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중은 대표될 수 없는 허상이라기보다 무한히 대표될 수 있는 실재에 가깝다. 다시 말해, 대중은 유동하는 집단이 아니라 수를 셀 수 있는 경합하는 집단이다. 전체와 선택된 것의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선택된 것들 사이에서도 불일치가 발견된다. 이러한 대중 사이의 불일치가 정치의 환경을 구성한다. 정치적 다원주의로 표현되는 이 환경에서 선택된 대중은 다른 선택된 대중과 전체의 자리를 놓고 투쟁한다. 이러한 것을 대중의 이중 투쟁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한쪽 투쟁에서 대중에 의해 정치집단은 상처를 입고, 다른 한쪽에서는 대중은 언제나 상흔을 남기는 그러한 폭력 자체로 여겨진다. 그러나 ‘촛불’은 대중에 의한 시위이면서도 동시에 비폭력・평화 시위로 규정되고 있다. 이것이 ‘촛불’에게 특별한 위상을 부여한다. 즉, ‘촛불’이 그 누구도 배제하지 않은 모든 차이들의 공약 불가능성으로 이루어진 전체 대중의 운동이었다는 판단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인식은 ‘촛불’의 주체성을 일반 의지로까지 고양시킨다. 다시 말해, 한국의 정치권력은 특정 인물 몇몇(좁게는 최순실과 박근혜. 넓게는 국정농단 세력)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이 소수의 지배권력에 의해 대다수 피지배 민중이 고통받았기 때문에 이 같은 대중의 참여가, 즉 ‘촛불’이 전체 대중의 의지와 다름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촛불’은 정치미학적 사건으로 규정된다.


 사람들의 복수적 연결, 다성적 규합인 촛불. 그것은 하나의 균질적 덩어리가 결코 아니다. 각 양의 실천들이 교차하는 촛불은, 분명한 공동성의 요소들과 함께 당연한 공약 불가능성으로 구성된다. 그리하여 각하와 그 부역자들에 대한 공통된 적대와 별도로 의식과 감각, 스타일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이견, 대립, 불화의 양상은 불가피하다. 그런 입체적 아상블라주(assemblage)로서의 촛불이 어소시에이션들의 어소시에이션, 즉 하나의 사회를 구성한다. 핍진한 삶에서 일어선 대중들이 만들어낸 경이로운 문화정치적 사건이 된다. [・・・・・・] 강렬한 스펙터클이다. 단체 공연, 집단 창작, 놀이문화로서의 촛불. 시위가 즐겁고 감동적인 까닭이다. 본질적으로 감각의 운동에 해당하고 감수성의 동요 효과를 수반하는 데모다. 몸과 의식에 덧붙여, 자신의 감각을 움직이고 주변 사람들의 정서까지도 흔드는 촛불이다. 국가– 비선– 자본 ‘그것들’ 사이의 고착화된 커넥션에 대항하는, 박근혜– 최순실– 이재용 ‘그것들’이 구축 한 부정한 게이트에 저항하는 촛불 또한 그 자체가 하나의 미학적 사건으로 꾸려진다. 함께해서 아름답고 행복하며 의미가 별다른 집단 표현의 사건이다. [・・・・・・] 혹자는 사뭇 평화적인 방식의 촛불시위에 대해 그것이 경찰과 조중동에 의해 위로부터 강제된 프레임이라며 불만을 표한다. ‘평화적인 집회’의 틀에 갇힌, 스스로를 가두어버린 시위라는 해석이다. 과연 그럴까? 아뿔싸, 이런 식의 인식 자체가 기성 운동의 낡은 관성 혹은 기존 발상의 구태의연함이 초래한, 우리 내부의 또 다른 강박관념이자 고정관념은 아닌가? 폭력과 비폭력의 이분법을 넘어서 있기에 오히려 국가권력 장치들을 후퇴시킬 수 있는 집단적 힘의 운동학, 대중적 포스의 물리학으로서 촛불을 사유해야 한다. [전규찬.(2017). 게이트들의 게이트, 촛불들의 촛불, 그리고 미디어 문화정치. 문학동네, 24(1): 1-3, 1-13]


바로 이와 같은 주장이 나로 하여금 ‘촛불’을 문화정치적(정치미학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이지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그리고 ‘촛불’의 비폭력・평화적 성격을 폭력과 비폭력의 이분법을 넘어서서 사유할 것을 요구하는 저자의 주장이 다시금 ‘촛불’의 폭력에 대해 사고하게 한다. 그 이유는 ‘촛불’의 미학에 담긴 미적인 강제성 혹은 ‘촛불’은 미적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곧 ‘촛불’의 비/폭력성과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양자는 서로 얽혀 있다. ‘촛불’은 비폭력・평화라는 전제 위에서 아름다울 수 있으며, 아름답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 올바른 것이라는 관념을 얻게 되는 듯하다. “촛불은 부정한 체제의 어둠을 비추고 국정 비리의 진상을 밝히는 견고한 반사 조명의 정동적 몸체만이 아니다. 동조 반응의 수동적 감응 신체에 머물지 않는다. 고정물이 아닌 유동체로서의 촛불은 그 정치미학적인 감각을, 다중이 행복해하며 촛불들의 다채로운 생기가 평화로이 공존할 수 있는 민주공화주의 장치 설계에 집중한다. 대중들이 내뱉은 분노와 명령한 진실들을 필요 한 지점에서 구체적으로 프로그램화하고 제도화하는, 현실 이후의 사회를 체계적으로 기획·지시하는 감독 역까지 떠맡는다.” (Ibid, 12) 즉, 이와 같은 주장은 오늘날 ‘촛불 정부’에 의해 완수되어야 할 적폐 청산의 사명감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균형과 조화, 곧 비례적인 평등의 질서이다.


치자와 피치자의 관계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더 나은 피치자들을 지배하는 것이 더 낫다. 예컨대 들짐승을 지배하는 것보다는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 더 낫다. 더 나은 자들이 생산하는 작품이 더 나은 법인데, 어떤 것은 지배하고 다른 것은 지배받는 경우 우리는 그들의 관계를 양자의 합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이제이북스, 1254a17, 27) / 자연은 자유민의 몸과 노예의 몸을 구별하고자 노예에게는 ・・・ 강한 몸을 주고 자유민에게는 시민 생활에 적합한 꼿꼿한 몸매를 준다. 시민 생활은 전시의 요구와 평화 시의 요구에 따라 구분된다. ・・・ 어떤 사람들은 자유민의 몸을 갖고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자유민의 혼을 갖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신상(神像)이 사람보다 훌륭한 만큼 어떤 사람들의 몸이 남들보다 훌륭하다면, 열등한 자들은 마땅히 그들의 노예가 되어야 한다는 데 모두들 동의할 것이다. 그리고 몸에 그런 차이가 있다는 것이 사실인 진대 혼에도 그런 차이가 있다는 것은 더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혼의 아름다움은 몸의 아름다운만큼 보기가 쉽지 않다. [・・・・・・] 어떤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자유민이고 어떤 사람들은 노예인데, 후자에게는 노예제도가 유익하고 정당함이 분명하다. (1254b39, 30) / 정의는 사회적 관계에서 작동하는 하나의 미덕이며, 거기에는 온갖 다른 미덕이 수반되기 마련이니까. 또 다수자가 소수자와 공직을 다투는 것도 정당하다. 다수가 전체를 소수자와 비교하면 다수자가 더 강력하고 더 부유하고 더 훌륭하기 때문이다. (1283a23, 171)


인용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언급들은 이제는 당연하게 여겨지지 않는 주장이다. 그러나 노예에 마땅한 자가 있다는 주장은, 심지어 교육계 고위 공무원의 입에서도 발화되는, 현대에도 되풀이되는 주장이기도 하다. 주장은 거부되었으나 오직 표면적으로만 거부된 것이다. 마치 황금관의 저주와 같이, 이것에 깃들어 있는 지배자의 숨결은 여전히 이것이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말해준다. 인용문의 인간과 동물, 주인과 노예, 다수와 소수의 자리에 다른 것들이 놓일 자리를 얼마든지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질서와 균형은 치자(지배자)가 이 자리에 언제든지 앉을 수 있게 하는 정기 티켓으로 통용된다. “우리는 『윤리학』에서 행복은 활동이자 미덕의 상대적이 아니라 절대적인 실현이라고 말한 바 있지만, 지금도 그렇게 주장한다. 여기서 ‘상대적’이란 그때그때의 필요에 따르는 것을 말하고, ‘절대적’이란 그 자체로서 선한 것을 말한다. 예컨대 올바른 행위를 생각해보자. 정당한 처벌과 응징은 미덕에서 비롯된 행위이지만 필요한 행위이며, 따라서 필요한 행위로써만 정당한 것이다. 반면 명예와 재산에 관계되는 행위는 절대적인 의미에서 가장 훌륭하다. 앞서 말한 행위는 어떤 나쁨을 제거하지만, 이런 행위는 그와는 반대로 좋음을 예비하고 창출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훌륭한 사람은 가난과 질병 같은 역경에서도 의연히 참고 견디겠지만, 행복이란 그와 정반대 되는 것이다(1332a7, 402).” 평화는 좋음을 창출하는 절대적인 좋음이다. 불화는 행복의 정 반대편으로 설정된다. 만약 ‘촛불’이 비폭력이자 평화인 동시에 ‘촛불’ 이후가 화해 상태로 표현될 수 있다면, ‘촛불’에 대한 해석은 절대적인 선으로 귀결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불화가 지속된다면 혹은 구조적으로 새로울 것이 없다면, ‘촛불’에 깃든 비폭력・평화의 이미지는 긍정으로 규정된 강제이다. 그렇다고 ‘촛불’을 폭력과 혼란으로 규정하려고 드는 것은 아니다. 폭력과 비폭력의 이분법은 내가 넘어서고자 하는 이분법이 아니다. 오히려 폭력 자체의 선명함과 불명료함 그리고 마찬가지의 비폭력의 선명성과 불명료성이 비폭력과 폭력 상호 간의 이미지를 구성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이것이냐 아니면 저것이냐' 하는 선명한 이분법 자체에도 그것이 무언가를 불명료하게 만들고자하는 의도, 즉 무언가를 지워내고자 의도를 바탕으로 깐다는 것에서 그 첫 번째 근거가 찾아진다. 이것을 선택하면 정말 저것은 탈락하고 마는가? 비폭력에는 폭력성이라곤 전혀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비폭력이 폭력이 종식된 상태를 의미하지는 않는 것이다. 비폭력 역시 폭력의 스펙트럼에 속해 있다. ‘촛불’의 비폭력・평화 운동은 화해를 향했지만, 오직 강요된 화해만이 오늘날 화해가 이루어지는 보편적인 방식인 듯하다. 화해의 가장 첫 단계인 그러한 폭력의 종식이 질적으로 더 우월한 폭력에 의한 폭력의 종식이라는 점에서 과연 진정한 폭력의 종식인가 하는 물음 그리고 폭력의 종식이라는 단계 자체가 도달 불가능한 상태에 있지 않은가 하는 물음을 던지고자 한다. 다시 말해, ‘촛불’에 대해 비폭력・평화라는 규정을 내릴 때, 그 규정 속에 들어있는 폭력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촛불항쟁은 기본적으로 전민적 규모의 가두 직접행동(direct action)이었지만, 그 행동의 양상이나 권력교체 과 정 모두 ‘체제 내’ 또는 ‘합법’의 틀 안에 있었다. 촛불항쟁의 몇 가지 요소 나 효과는 분명 혁명적이지만 다른 요소들은 전혀 혁명과 거리가 멀기도 한 것이었다. 이 양가성이 ‘촛불’의 성격 전반을 규정하게 한다. / 그 같은 모순은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에도 노정된다. 촛불항쟁 이후 의 시민정치는 ‘광장 정치’, 직접민주주의의 성격을 거의 잃었다. 또한 아래로부터의 개혁 의지와 시민 행동주의(activism)의 분위기는 존속하지만, 기 본적으로 ‘박근혜 퇴진 시민행동’ 같은 강력한 시민적 주체는 사라져 버렸다. 결국 ‘촛불’은 문재인 정부에 의존하며 제도정치 속으로 회수된 셈이 다. 또한 생활세계, 사회세계의 재민주화 문제에 있어서도, 저항은 군·기 업·대학 등에서 ‘갑질’에 대한 적발이라는 형식으로 산발(散發)하지만 몇몇 ‘나쁜 개인’들을 응징하는데 그치고 있다. 이는 촛불항쟁이 대학·기업·마을 등으로 옮겨 붙지 못 한 사정과 관계가 깊다. 즉 87년 6월항쟁 이후와 같은 광범위한 학원민주화운동이나 노동운동의 조직화는 없다. 학생회나 노조가 (재)건설된다는 소식은 별로 들려오지 않는다. 이것이 ‘갑질’을 제도적으로 차단하는 가장 유력한 방법인데도 말이다. [・・・・・・] 촛불로 타올랐던 시민정치는 이제 ‘광장’에서 일상과 의회정치로 산개했다. 차별 없는 민주주의와 생활세계의 민주화를 실행하는 것만이 촛불로 다시 회복한 민주주의를 불가역한 것으로 만들고 문재인 정부를 ‘성공’ 시키는 길이 된다. 이 정부의 ‘성공’이란 촛불항쟁의 완수로서, 한국 사회 경제의 구조를 바꾸는 것을 말한다. 법원·검찰·의회 같은 최상위 기구에서부터 여성이나 성소수자, 그리고 가장 평범한 노동자들까지 차별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생활세계를 새로 구축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 이 과제의 수행을 위한 주체와 새로운 ‘행동’이 대학, 기업 등에서 요청되는 것이다. 확고하고 진보적인 아래로부터의 시민정치의 다중적 주체의 힘이 여전히 약하다는 점이 근본적 문제다. 촛불의 주체는 진보정당이나 시민단체 혹은 풀뿌리 정치로 조직되어야 한다. 그러할 때 이 주체는 당분간 문재인 정부나 자유주의자들(소위 ‘리버럴’)과 ‘갈등하는 연대’ 또는 ‘연대하는 협력’의 관계에 놓일 것이다.[천정환 (2017). 촛불항쟁 이후의 시민정치와 공론장의 변화. 역사비평, 386-406, 387&404]




“2017년 대한민국 국민은 적폐 청산에 손을 들어주고 정권교체를 ‘이룩’했다. 정권교체 이후, 문재인 대통령 지지자 측에서는 “청와대만 바뀌었을 뿐, 재벌, 언론, 학계 등 한국 사회의 기득권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대통령에 대한 비판 없는 지지를 호 소하고 있다. 그러면서 성소수자 인권을 위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이들에게는 “나중에”를 외치거나 “대통령 흔들기는 그만두라”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정권교체’를 넘어서 ‘정치교체’를 위해 싸워야 하는 대상은 성보수화를 주도하고 있는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적폐청산은 ‘성’스러운 방식으로 국민을 재생산해 온 국민 재생산의 가부장제적이고 역사적인 고리를 깨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여성과 동성애자를 비롯한 다양한 성적 소수자들의 인권 및 시민권의 문제는 “나중에”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바로 지금”의 문제인 것이다.”

[손희정 (2017). 페미니스트 대통령 시대의 대한민국에게 권함. 한국여성학, 33(2), 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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